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원 Aug 20. 2023

이런 형태의 독서 모임은 처음이야.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것의 가치

책을 읽고 필사를 하거나, 일상 속 경험에서 드는 생각을 종종 기록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책에 대한 흥미는 독서 모임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졌고, 지금껏 나름 다양한 독서 모임에 참여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오프라인 독서 모임 중 하나인 '트레바리'에 여러 번 참여하며 다양한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인사이트를 얻었다. 그때 만나 친해진 좋은 인연과는 아직까지도 연락을 이어오며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고, 트레바리의 또 다른 모임 멤버들과는 비정기적인(?) 정모를 가지면서 서로 근황을 공유하기도 한다.


서울로 직장을 옮기기 전엔, '이번 주말'이라는 직장인 취미 활동 커뮤니티에서 자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책들을 읽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 최근 몇 개월간은 여러 다사다난한 일들의 핑계로 한 동안 독서 모임에 대한 생각은 슬며시 사라졌다.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매일 글을 쓰는 데 재미를 붙였다. 그런데 다채로운 글감과 새로운 영감을 얻으려면 다양한 인풋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풋이라고 하면 '채워 넣는 것'. 


외부에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나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경험, 독서, 기사와 잡지, 뉴스레터, 영상 콘텐츠 등 요즘은 매우 다양한 매체에서 인풋을 얻어낼 수 있다. 다양한 인풋과 함께 나의 생각을 녹여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퍼스널리티와 개성이 담긴 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익숙하고 좋아하는 인풋의 방식이기 때문에 독서 모임에 대한 원츠(Wants)는 계속해서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평소 알고 있던 취미 모음 앱인 '프립'을 통해 매주 토요일 저녁, 매주 정해진 도서로 모임을 진행하는 <북킷리스트>라는 독서모임을 알게 되었다. 엇보다 새로웠던 건 수평적 관계와 자율적인 참여를 지향하는 독서 모임이라는 것이었다. 책을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기보다는 책의 내용을 빌려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면됩니다.라는 모임 소개가 내 마음을 끌었다.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참여를 위해서, 모임에서는 아래와 같은 네 가지 모임 규칙이 있었다.


이름이 없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 줄 자신만의 별명을 사용합니다.

존댓말이 없습니다. 격식 없고 솔직한 참여를 위해 수평어(반말)로 이루어집니다.

비판이 없습니다. 자기 이야기이기 때문에 정해진 답은 없으며,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참여 권유가 없습니다. 본인의 관심 책이 있으면, 자율적으로 신청하여 참여하시면 됩니다.






토요일이었던 어제, 새로운 사람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 설렘 반 기대 반으로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이 날 참여자는 총 6명이었는데, 이전엔 10~15명 정도가 참여하는 모임 경험만 있어서인지 조금 조촐하다(?)는 생각도 했다. 게다가 밝은 형광등 불을 끄고, 책상 위 램프 조명과 스탠드 조명만 켜둔 채 조금 어둡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모임을 진행했다. 


처음엔 살짝 당황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자 금세 익숙해졌다. 램프 조명을 중심으로 둘러싼 우리들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니 마치 열기구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별명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하고, 서로의 이름과 직업, 나이를 밝히지 않은 채 책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데에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보통은 저마다 살아오면서 자신만의 경험과 식견이 쌓이다 보면 상대방의 직업과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필터가 씌워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고 내 생각을 나누는 데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모임에서는 그런 걱정 없이 온전히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그 생각의 다양성으로 인해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반말로 의견을 이야기하다 보니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반말이라니. 평소의 내 정서와 차이가 있었음에도 초반 몇 분만 지나자 금세 적응해 편하게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이번 모임의 책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이었다. 세계고전문학으로 유명한 책 중 하나로,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인 마리오 헤메네스가 '이슬라 라네그라'라는 섬에서 우연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마리오의 맑고 순박한 성품과 네루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심이 와닿았다. 마치 어른 동화처럼 느껴졌다. 


당시 칠레의 사회적 배경이 간간이 드러나는데 칠레와 이탈리아의 역사에 대해서도 또 다른 궁금증이 일었다. 이에 더해 마리오와 베아트리체의 애정 신도 적나라하고 외설적이라기보단 유쾌하고 해학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우리가 익숙한 현대 소설이나 현대적인 콘텐츠와 비교해 스토리의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오히려 그런 지점이 고전문학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00 님은 왜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나요?"


"마리오는 친구이자 메토인 네루다를 만나 인생의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요. 

00 님에게도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었나요?" 


"메타포를 사용해 최근에 느낀 정을 표현해 보아요."



하루 전날 공유된 발제문 외에도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 하고 있는 고민, 회사를 운영함에 있어 직원의 이탈을 막을 수 있는 현명한 방법, 최근의 관심사와 취미 등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우리들의 대화는 쉼 없이 핑퐁을 이루었다. 어떤 색안경도 쓰지 않은 채 편안하고 솔직하게 저마다의 고민과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세 시간은 밀도 있게 채워졌고, 내적으로 충만해지는 즐거움을 느꼈다. 


같은 주제와 질문에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니!

나는 각각의 사람들의 개성과 다양한 의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내 경험을 토대로 말하는 것도 좋아한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 여유롭게 내 의견을 더하는 방법을 배워갈 수 있다.


이번 독서 모임은 지금껏 참여했던 다양한 모임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모임이 될 것 같다. 앞으로도 읽고 싶은 책으로 모임을 진행하는 날에 종종 참여할 것이다. 하루 3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좋은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롭고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모임이 끝난 후 우린 뒤풀이를 가졌다. 치킨을 먹으면서도 반말로 대화를 나눴다. 물론, 직업과 나이는 여전히 밝히지 않은 채. 금기 시 되는 건 아니었지만 우린 모임에서의 대화를 되새겨 보며 서로의 직업 정도만 짐작해 볼 뿐 직업을 드러내진 않았다. 아직까지도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 단골 주제가 되는 mbti를 맞춰보기도 했다. 한 번에 맞춰지는 사람도,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 밝히고 말고도 자유였다. 그래서 더 재밌었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무언가를 경험하는 데에 시간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모임 멤버들을 보면서 나에겐 꽤나 새로운 자극과 동기가 되었다. 


요즘의 나를 라이프사이클 그래프에 비유한다면 최저점을 찍고 난 후 저점에서 이제 막 올라가기 시작한 상태이다. 바닥을 찍었을 땐 언제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갑갑한 굴레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시동을 걸기 위한 연료 주입을 마치고, 이제 막 출발한 상태랄까. 너무 빠르지 않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적당한 속도로 다시 달려 나가려 한다. 달리다 연료가 부족해지면 다시 주입하고, 너무 많이 달렸다 싶으면 중간에 잠시 서서 쉬어갈 수 있는 여유도 가지며 안정적인 나만의 주행을 시작할 것이다. 


우린 지하철 역에서, 허리와 고개를 숙인 채 동시에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다음 모임에서 또 보면 좋겠다는 인사와 함께. 다음 모임에선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벌써 우리의 예측할 수 없는 독서 모임이 기다려진다.




☞  인스타그램 '해원서재'

- 기획자의 책리뷰, 책과 문장을 기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세에 지장 없다'는 말이 주는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