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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작가 Dec 24. 2020

엘리베이터에서~

승강기 안내원 이야기


"어서 오십시오! 몇 층 가십니까?"



상냥하고 아리따운 아가씨의 목소리가 홀 안을 채운다.
연한 베이지색 모자 챙의 고급진 융이 부드럽게 누워 있고,
실크 질감의 화이트 재킷에 단 이름표 뱃지와  
반대편에 구슬박힌 루비 브로치가 푸르스름하게 반짝이고 있다.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가 끼고 있을 법 한 하이얀 망사 장갑이 허공 위에 보드라운 유선형을 그리듯,

그녀의 능숙하고 세련된  손놀림을 따라 하늘거린다.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날개짓으로 착각할 만 하다.
"5층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올라갑니다."

무한 반복 속 언어에 영혼이 없을지는 몰라도 상상 이상의
친절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무감각과 무심으로 때론 홀대를 받고 있는 것에 익숙한 그 시대에, 사뭇 감동할 만한 따뜻한 사화적 언어였다.

그것이 철저한 교육으로 훈련되서 양산된 산물일지라도,
사람이라면 갖는 따뜻한 체온과도 같은 언어 구사에 마음이 녹아지는 건, 당연하다.

엘리베이터가 위 아래로 무수한 반복을 하는 동안
그녀의 낭랑하고 달콤한듯 상냥한 목소리는 공간을
지배한다.

낯선 공간에 진입해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능수능란한 동작에 몇 초간 머무름에 대한 사유없이,
무심결에 이끌리어 그녀의 시간에 합승한다.

 이제 오롯이 그녀의 시간이다.

한 평도 채 안되는 공간에서 낯선 고요한 풍경.
어디를 주시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은
 한 번쯤 그녀의 반듯한 자태에 짐짓 놀라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듯한 눈빛이 부딪히는 순간을 마주하기도 한다.


선이 곱고,  자태는 아름답다.

목소리는 편안하고 청아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으시대는 것 같진 않지만,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과하는 것 같지는 않다.

체화된 품위 있는 말씨와 손 맵시에  분명 누군가는 반하기도 했을 것이다.

한 쪽 코를 막은 듯한 비음 섞인 소리에 자음을 정확히 씹어서 발음하는 아나운서 저리가라 할만큼 안정된 목소리톤.

그녀의 먼트를 또렷이 기억한 채,
집에 돌아와서 그녀의 말씨를 거울 보면서,
따라 했던 적도 있었다.

단박에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서툴게 몇 번 반복하다가,
혼자 풉하고 웃으며, 거울에 있는 나를 쳐다보다가 민망해 한 적도 있었다.

몇 십초와 몇 분간을 오가는 이동수단이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동행은 어찌됐건 불편함과
어색함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20년 넘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있었던 직업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기도,

전혀 생각치 않았던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기도 한다.
'승강기 안내원'이라는 직업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25년 전 쯤 서울의 모 백화점에서
처음 마주한 승강기 안내원!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녀의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충은 안중에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시대가 그때보다 결코 더 좋아진 것 같지도 읺다.

한 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7센티미터 뾰족구두를 신고,
8시간 이상 종종거리며 꼿꼿이 서 있어야 하는 노동.

밀폐된 공간에서  못된 놈의 나쁜 손이 추행을 해도, CCTV없는 시대여서 증거도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어디에 호소 못하고 가슴 속 깊숙히 누른채, 울다가 지새웠을 수 많은 밤.

그 후유증으로 인해, 폐쇄된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감.

몇 개월 더 다니고 버티다가,
정신적인 고통이 커져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어,
'개인적인 신상 문제' 로 사표를 던질 수 밖에 없는 현실.

그 직업은 사라졌지만, 다른 현장에서
이런 비슷한 사례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 곳곳에 왕왕 일어나는 일상이다.

우리동네 아파트값이 얼마며, 실거래가가 얼마 올랐다며
손뼉치고 좋아할 때, 주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뇌와 사회적 약자룰 돌보는 시스템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져 운이 나쁘거나 자신의 부주의 한 탓으로,
혹은 행실의 문제로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이 고작이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중 가해를 가하는 이들이 다수다.



25년 전, 꽃다운 20대의  아름다운 그녀를 지키지 못했던 사회가 50대 중년이 된 그녀와 마주한다.

그녀는 소망한다.
20대가 되어 사회의 첫발을 딛는 이땅의 아들, 딸들이
운이 나쁘지 않기를...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자신의 존재 만으로도 당당하기를...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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