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현 작가 Jul 01. 2016

붉은 풍경

지하철 3호선에서~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선지 지하철 안은 아직 여기저기 몇몇 자리가 비어 있어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오후 두 세시쯤 되었을 무렵이었으니,

당연한 풍경이었을게다.


다음 하차역 안내를 알리는 방송은 허공에서 떠돌다 하얗게 사라지고,

지하철 창을 향해 쇳소리 삼킨 몸통은 끼이익 철커덩 하고,

불안한 춤을 두번 추더니 정지선에 맞추어 정확히 멈춘다.


'압구정역'이라고 씌여진 글자와 3호선을 알리는 원형 오렌지색 도형이

하나가 되어 역의 표식을 알린다.

문은 스르륵 열렸고,

내 옆자리 두개의 빈자리는 채워졌다.


할머니의 갈라지고 거친 손에는

김치양념 붉은색이 봉숭아 물들인

손톱마냥 붉다가,

이내 붉은 노을 퍼지듯 손바닥에 고루 번져있다.


할머니의 손이 움직일 때 마다,

나를 감싸고 있던 지하철 공기는

이내 붉게 물든다.


어느 때는 조용히 눈을 감거나 졸기도 하고, 독서를 하기도 하는 나는,

그날은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 쓴 <읽는 인간>을 읽던 중이었다.

공기 중에 버무려진 할머니의 붉은 김치향을 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자그마한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내 귀에 울린다.


몇 분간 만 당나귀 귀가 되기로 하고,

책을 덮었다.

지금 할머니는 낮술 몇잔에 볼 빠알개진 할아버지와 조곤조곤 이야기 중이다.


좀 전 함께 다녀 온 모임에서 만난 지인들 이야기가 한창인 듯 하다.


"당신 앞에 앉아 있던 그 양반 집 딸이 지난달 결혼했다는 숙이 아니우?"

"걔네 집 아들 장우가 지난달에 러시아 가서~ "


누구누구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노부부의 대화 속 이웃의 소소한 삶의 이야기가 꽃이 되어 퍼진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서인지,

혹은 버릇이 된 것인지,

똑같은 내용으로 누구네 집 이야기를 아까부터 다시 되돌이표 악상처럼 반복한다.

할머니는 늘 그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같은 대답을 할아버지처럼 반복한다.

그러고는 슬며시 웃으신다.

노부부의 입가는 어느새 닮아 있었다.


'나이 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돌아서면,

그렇게들 남들이 사는 모양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양새의 꼴을 비교하기도 하고,

거기에 자신을 다시 투영시켜 보기도 한다.


때로는,

삶이 모두에게 닮아 있는 듯 다르기도 했다가,

다른 듯 하다가 결국은 또 그렇게 어느샌가 닮아 있다.


사는 것이 이렇듯 모순 덩어리 같다가도,

때론 합일체처럼 정교하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닌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을 배우고,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 눈 속에 할아버지 빠알간 볼이 비취고,

할아버지 눈 속에 할머니 빠알간 손등이 비취는 붉은 풍경!


그들만의 세상의 평화가 잠시 머무른다.


그들만의 오늘이 되어,

지하철 속도보다 더 빨리 하루가 또 지나간다.


매일 다를 것 같지만,

결코 다르지 않는

나의 하루도 어김없이 지나간다.

오늘이 또 지나간다.


그리고, 아까 덮었던 책을 다시 열었다.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소설에 인용했다고

써 놓은 이토 시즈오 <휘파람 새> 시의 한구절이 내 눈 앞에 한동안 머물러 있다.


['나의 영혼'이 무엇인지는 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말 할 수 없는 내 영혼을 위해

오늘 내가 기억한 한 자락의 풍경이

살포시 글로 다시 살아나기를...


2015. 12. 21. 월요일

구파발행 3호선 지하철에서 佳媛생각

매거진의 이전글 병아리 네마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