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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작가 Sep 09. 2016

철이 든다는 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마구 지나가도

아깝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쏜살같이 지나는 세월임에도,

내게는 느긋하게 지나가는

여름날 오후 느린 그림자 마냥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더디게 지나는 하루 덕분에

이날과 저날의 경계 또한 확실치 않았다.


4월과 5월,

아니 7월에서 7월 사이였던가?

녹슨 기억의 장난 탓에 정확한 날짜를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다.


단지, 햇살이 따뜻했던 것과

가벼운 옷차림의 나풀거림 등이

또렷이 남아 있는 것으로

그 날을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간간이 장난끼가 발동한 남동생과 토닥토닥

입씨름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난은

아침부터 계속 되었다.


"너희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도...

애들이 철 좀 들어야지!"


매서운 눈빛과 함께 한마디 쏘아 붙이는

이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속 신경질적인

말투에는 아침부터 간헐적으로

키득대는 우리의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른 절제된 표현이었을 것이다.


"철이 없어도 그렇지, 녀석들아!


네 할머니 돌아가신 날인데,

그렇게 웃고, 떠들고 계속 뛰면서 장난치고

있을거니?" 라는 이모의 함축적 이야기가

'철' 이라는 한음절 속에 고스란히 드리워져

들리는 순간이었다.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처럼,

몽롱해진 정신과 둔한 몸짓이 한데

어우러져 정신은 혼미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평정을 찾고자 정신을 차릴 때는

'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라는 생각에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쳐,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제서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맞딱드리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구나라고 더듬더듬 생각의

고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단숨에 철이 들고 말았다.


스베틀리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내용 중에서

좀전 동생과의 장난끼는 온데간데 없이...


정말이지, '어느날 갑자기' 라는 말처럼

나는 이제 좀 전의 내 모습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치, 마법이 걸린 듯~'


열 두해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내 가족의 죽음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친할머니 장례식은 누구의 어떤 일보다 더

나를 철들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삶과 전쟁이라는 극단적 단어의 아이러니 속,

전장에 나가 전투를 치룬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라는 책 속에서 마주친 이 문장이 내 몸 속으로 걸어 들어 온 날이었다.


".... 그 사건을 겪고 나는 단숨에 철이 들었지.

그 일은 누구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됐어...

그래서 다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웠지...."


내게 아련히 기억된 할머니의 장례식은 이 책에서 다룬 전쟁 이야기와는 결이 다른

죽음이었지만,

열두살 소녀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삶과 죽음'이

화두가 되어 체화된 날이었다.


어린이에서 성년을 지나,

장년, 노년을 거치는 무수한 삶의 과정에서

거치는 '철 듦'은 평생에 걸치는 담금질이 아닐까?


내게 할머니의 장례식이 그렇듯이,

누구에게든 단숨에 철이 들게하는 그런 사건을

종종 경험하리라.


철이 든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이자 현재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나비가 되려면,

허물벗기의 과정을 꼭 거치 듯~



철(iron)이 든 사슴 가족~

'철이 든다는 것'의 깊이를 생각해 보다.

문화평론가 김 정운의 글 속에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라는 말도 있긴 하다.


"삶은 철 들지 않은 날과 철 든 날로 나뉜다."

2016. 04. 20.  佳媛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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