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마리아

조국 잃은 청년의 슬픈 사랑

by 김정현 작가

쇼팽의 사랑을 찾아서~


쇼팽 ㅡLouis Auguste Bisson (1849)




"나의 사랑 마리아여!


당신의 마음이 왜 그토록 차갑게 식었단 말이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여전히, 이리도 뜨겁게 솟구쳐 오르고 있는데...나에게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오? 아니면, 당신에게 내가 무슨 큰 실수를 한 건가요? 이별을 고한 당신의 편지가 야속하게만 느껴지오."


낭만주의 음악가아자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폴란드 태생의 프레데릭 쇼팽(Fryderyk Chopin, 1810~1848)에게 청턴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약혼녀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 1819~1896)로부터 이별의 편지를 받고 말았다. 이후 마음의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는다.

Maria Wodzinska,의 자화상(1830)


20세 때, 바르샤바에서 두번의 연주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오스트리아 빈의 열정적인 연주를 끝냈다.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그 앞에 조국은'혁명'을 위한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조국 폴란드에서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위한 혁명이 일어났지만, 1830년 11월 러시아군으로부터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봉기는 결국 끝을 맞이하게 됐다.


이제 그는 가족과도 생이별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고, 어떠한 선택도 할 수없는 상태로 파리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된다.


폴란드 귀족인 보진스카 집안과의 친분은 쇼팽이 중학시절 보진스카의 삼형제와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5년 25세 청년이 된 쇼팽은 드레스덴에서 보진스카 일가와 재회하게 된다.

그곳에서 보진스카 집안의 막내딸 마리아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전에 보아왔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아리따운 16세 숙녀가 되어 그 앞에 나타났다.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가슴을 콩닥이게 했다.


그녀에게 마음이 빼앗겼는지 헤어질 때, 쇼팽은 마리아의 앨범에 <녹턴 E b장조, Op.9-2>의 첫 세마디를 적어주며 "1835년 9월 22일 행복하기를"이라고 덧붙인다.

다시 이틀 후에 <이별의 왈츠,Op.69-1>를 완성하여. 그녀에게 바치면서, 그녀와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작곡을 통해 보여준다.

과연 사랑은 숨길 수 없는 재채기 같은 것이다.


마리아는 그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쇼팽의 초상화를 그려서 그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마리아 보진스카가 그린 25세의 쇼팽


이후 마리아는 파리에 있는 쇼팽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당신이 떠날 때, 우리 집 피아노 위에 연필을 놓고 갔더군요. 여행 중에 연필이 없어서 불편했을텐데, 제가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당신을 보듯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게요."

그들의 사랑은 봄날의 따사로운 기운에 꽃망울 터지 듯, 생기 가득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태로웠지만, 2년 여의 약혼기간 동안 그들의 사랑은 그래도 유효했다.


유난히 병약한 쇼팽은, 잦은 감기와 각혈 등으로 몸은 무척 허약했다. 그럼에도 몸을 돌보지 않고, 밤 늦게까지 파리 살롱을 드나들며 동료들과의 만남과 연주를 계속했기에 건강은 악화 일로에 들어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쇼팽의 상태를 알게 된 마리아의 모친 테레자는 자신의 건강 상태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쇼팽에게 자신의 딸을 맡길 수 없다는 결론를 내리게 됐다.

결국 마리아의 마음도 부모님의 판단에 근거해 1837년 여름, 쇼팽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나의 허약함과 병약함이 우리의 사랑을 가로 막을 줄이야."


오늘날 현대 의학 수준이었더라면, 독감이나 결핵은 제대로 처방과 치료, 바른 영양섭취, 꾸준한 운동과 몸관리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쇼팽이 살았던 그 시절엔, 죽음에 이르게 되는 중병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건강 상태를 약혼 때부터 알고 있었던 마리아의 엄마 테레자 입장에서는,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쇼팽의 모습이 미덥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기에 딸과의 결혼을 성사시킬 수 없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됐을 것이다.


어찌보면, 쇼팽 입장에서는 이국 땅에서 아픈것도 서러운 일이었을텐데, 아프다는 이유 만으로 파혼을 당했으니 그의 서러움은 가히 설상가상이었다.


마리아와의 이별후에도 쇼팽은 지인를 통해서, 그녀의 소식을 가끔 듣곤 했다.

그들이 헤어진지 4년 만인 1841년, 마리아는 요제프 스카르베크 백작과 결혼한다.


한 때 자신의 약혼녀인 그녀에게 진심어란 마음으로 결혼을 축복해 줄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이후에도 결혼 생활이 평탄치 못한 그녀는 결혼 후 7년 만에 이혼을 했고, 다시 소작인 출신의 남자와 재혼을 했다.


마리아와 헤어진 이후, 쇼팽은 파리 살롱에서 두 아이를 둔 이혼녀이자, 페미니스트이자 남장여자로 유명한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 와 10여년 연인관계로 지냈다.

조르주 상드 초상화 Auguste Charpentier 작(1838)


그들의 관계 안에는 늘 마리아의 그림자가 쇼팽안에 드리워져 있어서, 상드와 사랑의 걸림돌이자,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쇼팽과 상드 ( 들라크루, 1838)


"내 안에 있는 그녀는 고요한 물가의 파문처럼, 일렁이는 마음이라오."

그의 사랑의 노래는 영원히 우리에게 울려퍼진다.


1848~1849년 쇼팽의 생애 마지막 사용했던 피아노(쇼팽박물관,바르샤바)




조국의 혁명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리아와의 사랑은 못다핀 꽃한송이... 그래도 쇼팽의 음악은 영원히 우리에게 '혁명'처럼 뜨겁다. 2019. 04. 15. 佳媛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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