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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작가 Aug 08. 2018

구원받은 강도

관매도를 가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4박 5일간 선배들과 함께  떠난 교회

전도여행이었다.   

당시  나는 기독교  입문한지 1년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신앙적으로 많은 산경험을 필요로 했던 시기였고, 그러던 차에 단행한 공동체
여행이기도 했다.


하루에 두세번 쯤 뜨는 뱃시간 중,

가장 이른 시간에

우리 일행은 모였고, 무사히 첫 배를 탈 수 있었다.  

목적지는 진도 팽목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관매도라는 작은 섬이었다.

매화가 가득한 섬...보러 오세요^^
중생대 백악기의 화석이라나...


 조그마한 유람선에 십여명의 일행이 타기 시작했고,  배 안에는 우리 일행과  

관광객을 포함해  20명  남짓한 사람이

타고 나니 배가 가득찬 느낌이었다.

작은 유람선 배를 타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에 설레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으로 집 떠난

여행이었고 ,  한편으로 인생 스릴 만점의 경험을

쌓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날 따라 기상청이 예보했던  일기와 다르게

풍랑이  있었고, 약간의 비바람이 동반된

쌀쌀한 날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토할 것 같은 생각에 뱃머리 쪽으로 몸을 비틀거리며 옮겼다. 그렇게 보고파 했던 바다였건만,

속이 메쓱거리니, 바다가 바다로 보이지 않았다.  

하늘다리는 여전히 하늘하늘~~


푸른바다는 그저 희멀건하고  뿌옇기만 한 비린내 풍기며 짠내 뿜는 소금물일 뿐이었다.     

처음 출발할 때 의기양양한 청년의 기상은 한풀

꺽였고, 내 마음 속 불안감은 배 위에 번지는

쌀쌀한 바람 위로 솔솔 엄습하기 시작했다.  


주변 일기와 상관없이 어린 후배들을 위해 꿀꿀한 분위기를  없애려는 듯, 선배들의 재미난 이야기가  두런두런 퍼지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재미난 이야기 덕분인지 좀전 까지

불편하게 느꼈던 출렁대는 배위에서 느끼는  메쓰꺼움과 거센비람을 이기지 못한  배가 풍랑에 뒤집히지나 않을까? 라는 황당한 나의 상상은  멈출 수 있었다.   


 한번 정도 토하고 나니, 오히려 속이 편해진 탓도

있었다.  

삼삼오오 이런저런 이야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 익어 갈 때 쯤,  

일행 중 본과 4학년 선배가 모여있는 우리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툭 던지는 것이 아닌가?   


"...  예수님 십자가 상에서 구원받은 강도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 "


뜬금없는 선배의 질문에 나는

'이미 성경에서 구원받았다고  하잖아요?'라고

툭 내뱉을 뻔 했다.

나의 단순한 답변은 다행히  입속에서 맴돌다 사라졌고, 그 누구도 이렇다 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좀체 제대로 된 답이 없었고,

머뭇머뭇 망설이 듯 입도 제대로  뻥끗하지

못 한 우리를 향해 구원이라는 테제 속 강도의 마지막 구원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선배의 얼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강렬히 서려 있다.
  

십자가 우편의 강도였을까? 좌편이었을까?

성경에서는 자세하게 표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마지막에 등장했던 인물 중

구레네 사람 시몬을 제외하면  내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줬던  인물 중의 한사람이 '구원받은 강도 '가  아닐까 싶다.


그 선배의 진지한 해석 속에

강도는 그냥 강도가 아니었으리라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좌우편의 강도가 서로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마지막을 함께 했었고,

그 중 한 강도는 예수님을 통해 마지막 구원을

이룬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구원에 관한 논쟁과 담론을 펼칠 때마다,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기적같은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흔하디 흔한 예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가까스로의 구원'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강도의 믿음을 저급한 논리의 대상 정도로  치부하려고 하는 경향이 적잖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십자가 상에서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한 구원받은 강도는 과연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을 맞이하였던 것일까?  


 저급하게 예수께  구원을 구걸해서 얻어낸 마지막 부끄러운 구원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

비록 성경에는  '강도'라는 단어로 두 사람을

동일시하여 표현했지만, 소위 남의 물건을 훔치고 피해를 입히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삶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치범 수용소 출신의 강도 정도이지 않았을까? 라고 혹자는 추측하기도 한다.

후자 쪽 의견이 더 신뢰가 가기도 한다.    
   

즉, 언젠가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는 사이에서

먼발치에서라도 예수의 이적과 행적을 본 적도

있을 것이고  들었을 것이다.


정치적 메시야를 갈구하며 기다리던 백성 중의 한사람이지는 않았을까?  

   

다만, 구원받은 강도가 죽음을 앞둔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자신이 기다리던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인 것을 순간 깨달았을지 모른다.  


그랬기에 그가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예수님은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화답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선배의 질문으로 시작된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는 30년 가까운 신앙생활에 있어 성경 안의 이야기 만이  아닌 실존과 실천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하는 깊이 있는 해석이 존재했음을 인정했던

각별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성경에 있는 글귀는 활자로  만의 해석이

아닌 관주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됐던 계기이기도 했다.


그 해 떠났던 '관매도 섬 전도여행'의 시작점이었던 선상의 기억을 오롯이 떠올릴 수 있었던 것과  

여행 중에 만났던 섬주민의 순박하고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아스라한 섬 정경을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관매도로 가는 배 위에서 선배의  '구원받은 강도'에 관한 질문과 선명한 해석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곳은 얼마만큼 변했을까?

자연은 들고 남 없고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으리마는,  오직 사람만 변하여  우리를 맞이하리라.


돌묘야 꽁돌아 그대로인 것이지?
방아섬아 그대는 안녕한가?


내 너를 만나리라


스무살 풋풋한 감성을 다시 찾아오고 싶은

강도와 같은 생각이 쑤욱하니 올라 오는 날이다.
  


2018. 8. 8.
구원 받은 강도를 생각하다.
삼복 더위에 시원한 겨울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추위가 찌릿찌릿 전해진다. 가원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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