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먼지차별'

괜찮았던 것들이 괜찮지 않게 되었다 (1)

by 지지아나

1.

작년 봄, 40대 초반 여자 직원이 곧 정년을 앞둔 이사님께 청첩장을 들고 인사를 드리러 왔다.


“이사님, 저 이번 달에 결혼해요.”

“오, 축하해. 그래,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이야?”


대화가 끝나고 여자 직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사님은 옆에 서 있던 이 부장님에게 말한다.


“근데 이 부장, 저 친구 도대체 몇 살이야? 초혼인가? 저 나이에 애가 생기겠어?”


며칠 뒤 40대 중반 남자 직원도 청첩장을 들고 이사님께 인사드리러 왔다.


“이사님, 저 다음 달에 결혼합니다.”

“이야, 김 차장, 드디어 장가를 가는 구먼! 일이 많아 결혼이 늦어졌지. 언제 하나 했더니 드디어 하는군. 신부가 5살이나 어리다며? 능력이 좋아, 이 친구!”


2.

입사 3년 차 어느 날, 이사님과 회식이 예정되어있었다. 팀원들은 편한 자리를 찾아 눈치싸움을 벌였다. 이사님 자리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적당히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마음 편히 고기를 먹고 싶었다. 옆자리는 이제 제발 그만. 박 부장님이 이런 나를 보기 전까지는 가능한 시나리오 같았다.


조금 늦게 회식 장소에 도착한 부장님은 노발대발이었다. 유일한 젊은 여자 직원이었던 나를 콕 찍어 불같이 화를 냈다. 옆자리에 앉은 입사 동기 남자 직원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ㅇㅇ씨,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얼른 여기로 와. 이사님 옆자리는 젊은 여직원이 앉아야 분위기가 좋아진단 말이야. 우리 팀 이번에 잘 보여야 하니까 얼른 자리 옮겨.”

“네??? 네...”


그럼 그렇지. 오늘도 고기는 끝이다.


3.

몇 달 전, 신입직원인 영규 씨가 부서 배치 후, 팀원들에게 자기소개하는 중이었다.


“영규 씨, 근데 고향이 지방인가 봐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 근데 저 서울말 쓴다고 노력했는데, 티가 많이 나나 보네요. 하... 하하”

“어쩐지. 그럼, 엄청 티 나지. 가린다고 그게 가려지나. 편하게 해요. 하하하. 근데 지방에 살았으면 문화생활 잘 못 했겠네? 경험을 많이 해야 아이디어도 잘 떠오를 텐데. 괜찮아, 우리 회사에 지방 출신들 많아.”



‘먼지 차별(Microaggression)’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웹드라마 '며느라기'를 쓴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보다가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겪었던 찜찜하지만 뭐라고 따지기는 어려운, 작지만 수없이 벌어졌던 그렇고 그런 차별적인 상황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차에 딱 맞는 단어를 찾게 된 것이다. ‘아주 작은’이라는 뜻의 ‘Micro’와 ‘공격’을 뜻하는 ‘Aggression’을 합친 말로, 2015년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다.


Microaggression (출처 : Oxford Learners Dictionary)

an act or a remark that discriminates against one or more members of a minority group, either deliberately

Research has shown that microaggressions and unconscious bias have a negative impact on mental health.

Examples of microaggression include making assumptions about people's abilities and preferences based on their race or gender.


해석하자면 이렇다. ‘먼지 차별’은 고의로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소수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 발언을 말한다. 이는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 예로는 인종과 성별에 근거한 능력과 선호도에 대한 가정이 있다. 즉, 성별, 나이, 인종, 장애 등에 대해 미세하지만 만연해 있는 차별을 말하며,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모욕감이나 적대적인 감정을 느끼면 먼지 차별에 해당한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먼지 차별 사례 세 가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수많은 미세한 차별 중 일부에 불과하다. 여성이어서, 때론 남성이어서, 혹은 지방 출신이어서, 장애인이라서, 백인이 아니라서 등의 이유로 우리는 서로 사소한 차별들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주고받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이런 먼지 차별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 잡을 때, 누군가는 삶에 무기력을 느끼고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나만 하더라도 그렇다. 젊은 여자 직원은 나이 든 남자 임원의 옆자리에 앉는 게 당연했다. 이사님과의 회식 자리에서 나는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벌게졌지만 내색하지 못했고, 술잔을 채우고 돌리고 고기도 열심히 구웠다. 심지어 노래방에서도 옆자리는 나를 위해 비어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칭찬이랍시고 했던 말이나 행동 속에도 먼지 차별이 묻어난 경우가 많았다. 처음 입사한 직원들과 대화하며 자연스레 고향을 묻고,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사투리를 쓰지 않으면 '서울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살면서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의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을까. 정수기 물통을 갈아야 할 때, 혼자 낑낑거리다 보면 어느새 남자 직원이 다가와 도와주었고, 은연중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남자 직원이 없었다면 혼자 하고 말았을 일을 말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보수적인 문화를 가진 우리 회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다는 것이다.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60년대생 임원부터 90년대생 막내까지 열심히 노력 중이다. 이전에는 당연했던 것들이 점점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면서,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벅찬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10년간의 조직 생활을 되돌아보니, 암묵적으로라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하는 것과 아닌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약자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다만 사회적 이슈로 급부상한 갑질이나 괴롭힘보다는 아직 ‘먼지 차별’ 개념은 덜 알려져 아쉽다. 이제는 나부터라도 '무의식적으로' 주고받는 사소한 차별을 줄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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