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갑질’이고 ‘괴롭힘’이거든요!

괜찮았던 것들이 괜찮지 않게 되었다 (2)

by 지지아나

평범한 주말 밤이었다. 윤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고 부모님과 평일에 못다 한 대화를 나누며 편안히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


밤 10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얼마 전 윤혜네 팀으로 발령 난 박 차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전화지? 급한 일인가?’


박 차장은 윤혜의 직속 상사였지만 주말 밤늦게 연락할 만큼 친분은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전화 받기가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회사에 출근하는 워커홀릭이었고, 그만큼 후배들도 자기 업무 스타일에 맞춰 일해주기를 바랐다. 때마침 직속 상사로 발령받아 온 터라 윤혜는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와 주변의 떠들썩한 소리가 한꺼번에 윤혜의 귀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최대한 그가 하는 말을 끊지 않으며, 많이 취한 것 같으니 얼른 들어가시라고 대답했다. 윤혜는 왜 이 시간에 전화해서 술주정을 부리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가 용건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그는 뜬금없이 윤혜에게 꼭 한 번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너무 좋은 사람이니 꼭 만나보라고 했다. 바로 옆에 있으니 전화를 바꿔주겠다고 했고 누군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또 다른 남자는 중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뿔싸. 이 목소리. 그는 다른 팀 유부남 김 차장이었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소개해주고 싶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 저분 유부남 아니었나? 그사이 이혼이라도 한 건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윤혜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회사를 1~2년 다닌 것도 아니고, 새삼스레 지금 나를 소개할 필요도, 그의 소개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 어디에 있냐며 계속 확인하는 박 차장의 전화를 겨우 끊었다. 짧은 순간 온갖 감정이 휩쓸고 지나갔다.


윤혜는 생각했다.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했으면 이 늦은 시간에 아무 거리낌 없이 저런 전화를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회사에서 처신을 잘못하고 다닌 건 아닐까?’, ‘너무 우습게 보이게 행동했었나?’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신을 탓할 일이 아니었지만 비참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이 시간이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아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도달했을 때, 윤혜는 비로소 큰 용기를 내 이 일을 회사에 알리고 박 차장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윤혜는 '이건 나와 박 차장의 일이니 다른 사람들까지 알게 되어 그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다른 직원들에게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리고 더 이상 같은 팀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직은 윤혜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사과할 일이냐, 엄한 사람 앞길 막지 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윤혜가 그동안 책임감을 느끼고 충실히 업무를 수행해온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조직의 태도에 그녀는 앞으로 이 회사에서 최선을 다해 역량을 발휘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박 차장은 억울했다. 그는 그날 윤혜에게만 전화한 게 아니었다. 다른 팀 김 대리, 이 팀장에게도 전화했고 그들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윤혜만 유독 예민하게 받아들였고, 그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가 그날 밤 윤혜 말고도 통화한 김 대리, 이 팀장. 이 두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은 모두 ‘미혼의 여성 직원’이었다. 그렇게 소개해주고 싶은 좋은 사람이라면, 다른 '유부녀' 사원과 '유부남' 과장에게도 전화해서 소개해주면 됐을 텐데. 왜 그들에게는 전화하지 않았을까? 그날 그 술자리에 얼마나 많은 미혼 여자 직원들이 안줏거리로 오르내렸을지 생각하니 윤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그날 밤 같은 전화를 받은 김 대리가 윤혜를 찾아왔다. 김 대리는 이렇게 말을 했다.


그때 같이 용기 내지 못해서 죄송해요. 저도 그때 너무 기분이 나빴는데, 매일 봐야 하는 차장님이니까 차마 그렇게까지 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혼자 싸우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박 차장이 윤혜 때문에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내용이었다. 박 차장 짓이었다. 그는 술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하며 윤혜와의 통화 녹음 파일을 들려주었다. 그와 친한 사람들은 윤혜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인사를 받지 않고 은근히 따돌렸다. 윤혜 혼자 영문도 모른 채 '2차 가해'를 당하고 있었다.


박 차장에게 전화가 온 그날부터 윤혜의 시간은 멈춰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예전 같은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회사에 다니고는 있지만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일할 의욕도, 그럴 의지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용기 내서 살아가다가도, 때론 자신이 자신에게 내린 형벌에 지쳐 하루를 살기도 힘든 그런 시간이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윤혜'에게

"마음의 상처는 세월도 약이 되지 못한다는 말의 뜻을 절실하게 알게 되었어요. 불쑥불쑥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깊은 아픔을 느낍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넘어갔던 일들이, 요즘 다른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회사생활을 하며 겪은 일들을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요.

저와 비슷한 상황으로 고민하는 다른 후배들을 보면서,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용기 내어 제 이야기를 공개했고, 이를 있는 그대로 들어준 사람들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이제는 그 힘으로 좀 더 많은 사람과 저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요.

만약 옆에서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저 또한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에서 힘들어하는 분들이 분명 많을 겁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알게 되었어요. 크든 작든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다는 사실을요.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저도 당신도 상처가 치유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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