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신한 위로가 필요한 밤
행동뿐 아니라, 감정도 습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 있다.
나는 대체로 긍정적인 편이지만,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면 여지없이 깊은 구덩이로 들어가고야 만다. 상상 속 비극의 끝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현실의 '나'로 돌아온다. 계속되는 불면증에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주 업무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1년에 몇 차례 반복하는 일이었다. ‘준비–진행–마무리’를 두세 번 겪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나갔다. 비슷한 업무를 5년 넘게 반복하면서,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느꼈고, 특히 연말이 되면 너무나 무기력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번아웃인가 싶은 정도로.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힘들 땐 잠시 쉬어가도 괜찮은데, 그 순간마저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그저 두고 볼 수 없었다. 계속 다그치며 ‘뭐라도 해야지’ 하며 했던 일이 책을 읽고 글을 조금씩 써보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삶에 의욕이 없을 때,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에너지를 얻는다던데, 나는 딱히 재미난 취미가 없었다. 독서와 산책이 취미라면 취미였지만, '재미있냐'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즐거우면 그만인데, 취미마저도 남들에게 재미있다고 말할 만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지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자 조금 나아졌다. 현재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요즘 나는 내게 힘이 되는 ‘푹신한 위로법’을 찾고 있다.
나는 푹신푹신한 것들을 좋아한다.
폭신한 잔디밭에 누워 가만히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면 좋겠다. 푹신한 바닥의 신발을 신고 숲 냄새 가득한 곳을 여기저기 걷는 것도 좋다. 나른한 오후 포근한 이불이 깔린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누군가의 글을 읽고 내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의 마음은 푹신한 것을 더 좋아한다.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몸과 마음 모두 지쳐있을 때, 닫힌 마음의 문 앞에 살며시 다가와 노크하는 친절한 누군가의 말. 내가 베푼 친절을 알아보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는 누군가의 행동. 그 누군가가 없는 날에는 내가 나에게 작은 위안을 주고 싶다.
그동안 나는 푹신한 위로를 갈망했다. 회사 때문에,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한탄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대신 마음의 방향을 바꾸면 조금 나아졌다. 받기를 바라기보다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주면 어떨까? 다른 이에게 먼저 손 내밀었을 때의 경험들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고, 이는 내게 힘을 주었다.
종종 현실의 불안감이 온몸과 마음을 뒤덮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책으로 불안감을 다스린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과 수다 떨고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좋지만, 그때뿐이었다. 본질적인 불안과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숙제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았고,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 같았다.
특히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이대로 안정적인 삶을 쭉 살아가면 그만일 듯싶은 순간에, 더 깊은 불안이 찾아왔다. 일하는 동안 내 가치관과 다른 선택을 해야 했을 때, 그리고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른의 삶이 이런 것임을 알았더라면 영원히 나이 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 파악이 우선이다.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안이 무엇인지, 왜 불안을 느끼는지, 어떻게 불안감을 해소하고 삶을 살아가는지 알아야 했다. 나는 그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을 택했다.
불안의 본질에 대해 정리한 프리츠 리만의 『불안의 심리』(문예출판사)를 읽으며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불안이란 결국 외부의 자극에 내 마음이 끊임없이 반응하기 때문 아닐까’하는 생각에 구사나기 류슌의 『반응하지 않는 연습』(위즈덤하우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갤리온)도 읽었다.
불안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자, 외부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방법이 궁금했다. 로버트 마우어의 『두려움의 재발견』(경향BP)과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해냄출판사)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단단한 가치를 만들고 싶어 임경선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한겨레출판사)와 『자유로울 것』(위즈덤하우스)도 찾아 읽었다. 특히 고전 작품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은행나무)은 마음이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을 때 제일 먼저 찾아 읽는 책이다. 책을 처음 접한 대학생일 때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이, 책을 읽고 난 후 매번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요즘은 소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있다. 나는 원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실용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착각이었다. 작가 고유의 철학과 지식, 경험이 녹아든 잘 쓰인 소설 한 편을 읽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과 통렬한 통찰의 힘을 배울 수 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부분이다.
혹시 살아가면서 지속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혹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든다면 꼭 책을 펼쳐보면 좋겠다. 책 속에는 이미 내가 했던 무수한 고민과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진정한 인생의 선배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