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을로 들어오다
한국에 살면서 나는 스스로 내가 살 집을 찾아 나서야 했던 경험이 없었다. 다행히 말라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를 위해서 마련된 숙소가 있었다. 내가 지낼 마을에 있는 스카우트 캠핑장 내의 단독 게스트 하우스에서 5개월을 머물게 되었다. 캠핑장에 살면서 좋았던 점은, 캠핑장 입구에서 샛길을 따라 걸으면 매일같이 출근하는 마을 공부방까지 20분이면 닿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영국 식민의 상징이기도 한 이런 커뮤니티용의 게스트 하우스들은 오늘날에는 방문객이나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 활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집들은 현지 주민들이 사는 마을 안에 위치해 있으나 상대적으로 럭셔리한 조건들을 자랑하는데, 예를 들면 전기가 들어오고 집에서 수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들이 아니면 보통 이 정도가 기본 수준이다. 내가 지낸 곳은 선풍기는 없었고, 와이파이나 인터넷 모뎀이 없었기에 인터넷은 내가 따로 인터넷 동글 usb를 사서 데이터를 충전한 다음에 컴퓨터에 꽂아서 사용할 수 있었다.
캠핑장을 관리하는 현지 출신의 스카우트 직원 A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냈는데, 내가 파견 가기 전에 1기 남자 활동가 분이 2년 동안 그곳에서 가족들과 머물렀다고 했다. 이 직원분은 1기 활동가 분이 계실 때 그의 마을 주요 조력자로 활동을 했었는데, 내가 파견을 간 첫 5개월도 나의 마을 공부방 사업을 도와주는 조력자로 역할을 했다.
내가 가기 이전에 계셨던 활동가 분과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와 그의 가족들은 먼 한국에서 온 젊은이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아시는 듯했다. 캠핑장 안에서 가족들이 사는 집과 내가 사는 집은 50m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거기서 살기 시작한 며칠은 매일같이 저녁에 나를 초대해주셨다.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과 비상식량 외에 마을에서 무엇을 해 먹어야 할지 몰랐기에, 저녁 식사 초대는 너무나 반가웠다.
이 집에서의 생활은 5개월로 짧게 마무리를 지었다. 5개월의 활동을 마치고, 잠시 한국을 갔다가 다시 말라위로 파견을 왔을 때는 캠핑장의 위치에서 더 산으로 5km 올라가면 나오는 선교 마을의 교회에서 마련한 외국인 게스트하우스에 방 하나를 얻었다. 게다가 매달 내던 집세도 100달러 정도에서 60달러로 줄었다! 비록 큰 길가에서 10km를 걸어야 하고, 이제 마을 공부방도 한 번 갈 때 40분을 걸어야 하지만 내 마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나의 집 책임자로서, 동시에 사업의 조력자로서 있는 A와 5개월을 지내고 나니, 내가 더 말라위에서 더 머문다면 이 집에서는 못 지내 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A는 1기 활동가 분이 자신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을 이용해서 주민들에게는 전혀 이로움이 안 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5개월의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지만, 매번 미팅마다 녹음기를 들고 가서 현지 마을 분들의 논의와 갈등 관계까지 다 파고들던 나는 ‘이대로 계속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것뿐만 아니라 숙소 자체에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 게스트 하우스는 말 그대로 덤불에 둘러 쌓여 있었다. 낭만적이게 들릴 수 있지만, 생활공간으론 꾀 야생적인 공간이다. 특히, 밤이면 온갖 벌레들이 다 나오고 눈 뜨면 불개미들이 샤워장 입구에 거대한 무리를 지어 나를 경악하게 만들곤 했다. 특히, 눈에 보이는 것보다 소리만 들리는 것들이 더 무서운데, 밤이면 바깥 덤불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현실을 극대화시키곤 했다. 선풍기가 없어서 가장 후회했던 내가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 가장 먼저 투자한 것이 바로 선풍기이다! 이제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다 열어재끼지 않고도 시원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때론 우리가 풋내기이고, 순진하고, 멋모를 때 과감한 선택을 내릴 수 있고, 그 선택은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시작이자 희망이 될 수 있다. 해오던 것을 지속하는 것은 더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배반하고, 그곳 다수의 주민들의 기대와 바람에 배반한다. 난 이 결정으로 인해서 한 명의 조력자를 잃었지만, 나중에 수많은 조력자들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