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함께하는 출근길
이전에 살던 스카우트 캠핑장도 이미 좀바 산으로 향해 가는 지점에 있었다. 거기서 5km 정도 경사진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마을 하나가 나오는데, 이는 오래전에 이곳에 온 선교사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왼쪽 편에는 아주 조그만 동산 하나가 있는데, 그 산턱에 근사하게 지어진 벽돌집이 내가 2년 동안 지낸 게스트하우스다.
마을은 교회뿐만 아니라 같은 장로교파에서 운영하는 기숙형 고등학교, 그리고 국립 초등학교가 위치해있다. 이 때문에 저 아래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매일같이 이 산을 오르고 내린다. 처음에는 왜 산에 학교를 세웠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 나름의 해석으로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에선 농사를 지으며 가족들과 생계를 꾸리는 데 집중하고, 여기 산에 오면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함과 학업에 매진하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하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초등학교 아이들이 아침이면 학교로 올라갈 때, 나는 보육원 운영을 위해 마을 공부방으로 내려간다. 아이들보다 나를 더 먼저 반겨주는 것은 게스트 하우스 뒤편의 산속에 사는 원숭이 가족들이다. 원숭이와 이웃으로 살았던 것은 그 어떤 기억보다 말라위에서 이 산골에서의 나의 삶을 가장 아프리카스럽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한 번은 애기 원숭이와 길목에서 단 둘이 마주했다. 애기 원숭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때 난 애기 원숭이가 사진이나 영상에서 보듯이 귀여운 아기로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애기 원숭이 혼자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갈수록 그 뒤를 어슬렁 거리는 어른 원숭이들을 보았을 때, 정말 오금이 저린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너희가 있는 곳 거기가 내가 사는 집이기도 해. 나 좀 지나가도 될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내 얼굴이나 알아볼지 조차 의문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더 산으로 올라가서 더 야생적인 삶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오래전부터 선교사들이 고고하고 정갈하게 가꾸어 놓은 이 마을이 훨씬 내게는 정겨운 마을에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해 주었다. 왕복으로 한 시간 정도 더 걷는 것은 더 이상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길고 긴 산행의 끝에 내가 편하게 발을 뻗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 마을에서 주민들과 섞여 일하는 공간과 내가 혼자서 쉬며 충전하는 공간이 분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여기서 지내면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장보는 것이다. 한번 시장을 가면 1-2주 치 분량으로 두둑이 봐야 한다. 이 산골마을에서도 간단한 것들, 예를 들어 식빵, 계란, 인스턴트 파우더 우유 등은 구멍 시장에서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신선한 먹거리는 시장에 가야만 한다.
장을 보고 집으로 다시 돌아갈 때는 2 달러 정도를 주면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올라올 수 있다 (자전거 택시도 있지만 산으로 올라가는 지세이기에 비효율적이다. 택시 기사에게도 고통스럽고…). 매번 타는 것은 아니고, 마을 여자 친구들이 동행을 해주면 다 같이 짐을 나눠 들고 걸어서 올라올 때도 있고, 어쩔 땐 짐만 싣고 옆집에 사는 목사님 댁에 맡겨놔 달라고 하고 나는 걸어서 올라가곤 했다. 마을 공부방을 마치고 장을 보러 가는 날은 아프리카는 해가 워낙 일찍 떨어지기에 장을 보고 어둑어둑해지면 무조건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간다.
밤에도 이 선교마을은 전기가 곳곳에 들어오며, 특히 기숙사 고등학교 부근에는 빛이 밝게 난다. 여기로 이사 오고서 좋았던 점 중에 또 하나는 게스트 하우스를 밤새 지키는 경비원이 있다는 점이다. 추워지는 건기에도 경비원들이 침낭에 들어가서 집 문 밖에서 자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 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보냈다. 서른한 살이 된 지금 돌아보아도 내 평생 부모님의 집을 떠나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매 순간이 늘 파라다이스였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아래 마을에서 하는 교육 사업에 집중하면서도 나만의 독립된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채운 하루하루를 이 산이 채워주었다.
나는 말라위의 청산에 살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