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그리움을 견디는 작은 연습

by 지애롭게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입원해 계시던 한 달 동안의 시간은 지금도 제 안에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입맛이 없으셔서 무엇이든 드시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시면, 그 말 하나에 얼른 사다 드리고 싶었던 때였다.

아빠가 계시던 곳은 연대 세브란스 간호병동이었고, 코로나 시기이기도 해서 면회 시간은 길지 않았다. 원래라면 우리 가족처럼 하루 종일 병실에 머무를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정해진 면회 시간에 잠깐 들렀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우린 아빠 곁을 비울 수가 없어서, 24시간 교대로 병실을 지켰다.


낮에는 언니가, 엄마는 퇴근 후 병원으로 와서 아빠를 보고 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밤 시간은 나와 남편이 맡아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병실에 머물렀다. 그렇게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약 한 달간 우리 가족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번갈아 아빠를 돌봤다.


아빠는 통증 때문에 수면을 유도하는 약을 자주 투여받고 계셨고, 약 기운 때문에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시는 때도 많았다. 새벽이면 간호사분들이 우리에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할 정도로, 가족 모두가 온 힘을 다해 아빠를 지키고 있었다.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은 몹시 힘들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만큼은 정말 잘 버텨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 곁에 있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을 떠올릴 때면 늘 남편에게도 깊이 고마운 마음이 든다.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제 곁에서 함께 버텨주었고, 가족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아마 간호사분들도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며 면회 시간 외에도 병실에 머물 수 있도록 눈감아주셨던 것 같다. 그땐 뭘 몰라서 간호사들이 우리가 지극정성이라 이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건가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의 마지막이 임박해서 우리에게 그런 시간을 줬던 것 같기도 하다. 원래는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시간을 우리 가족에게 내어준 일이 오래도록 감사하게 남아 있다.


약 투여가 더 잦아지기 전, 아빠의 정신이 비교적 또렷하셨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가 나에게 크림이 들어간 빵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연세세브란스 지하에 있던 파리크라상으로 뛰어갔다. 기왕 드실 거면 조금 더 맛있고, 조금 더 좋은 빵을 드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고급스럽고 부드러워 보이는 크림빵을 골라 사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빠는 빵을 보시더니 웃으시면서, 이 빵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제야 난 아빠가 말한 것이 편의점에서 파는, 익숙하고 소박한 그 크리미빵이었다는 걸 알았다.

다시 나가서 사 오겠다고 했지만, 아빠는 괜찮다며 지금 이걸 먹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반쯤 드시다가 내려놓으셨다. 그 한 장면이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았다.


그러고 한 달쯤 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는 한동안 편의점 빵 코너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크리미빵만 보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원래 저도 엄마도 좋아하던 빵이었는데, 그 뒤로는 차마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아빠가 원했던 바로 그 빵을 제때 사다 드리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생각보다 오래 나를 붙들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2년쯤 지났을 때였다. 어느 순간, 아빠에 대한 기억을 계속 슬픔과 두려움으로만 품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아픈 것이기도 하지만, 끝내는 다시 마주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름의 용기를 내어 편의점에 갔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미빵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사서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한테 빵과 술을 올려드리며, 그때 그 빵을 바로 사다 드리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씀드렸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드리고 싶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엄마께 웃으며 전했더니, 엄마는 듣다가 결국 오열하셨다. 나는 웃으며 얘기했는데, 엄마 마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빠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과 슬픔, 허망함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줄 알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짙어지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아빠를 떠올리면 따라오던 슬픔의 잔상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씩 마주하고 건너오면서 조금씩 다른 결로 바뀌고 있었다. 여전히 아프지만, 예전처럼 무너질 정도는 아니게. 슬픔을 지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쪽에 가까웠다.


아빠는 붕어빵도 참 좋아하셨다. 겨울이 되면 늘 퇴근길에 붕어빵을 사 들고 집으로 오셨다. 그래서인지 어느 해엔가 신혼집 근처에서 붕어빵 파는 곳을 보고, 길 한복판에서 아빠 생각이 나 한참을 울었던 적도 있다. 그 이후로는 붕어빵 장수가 보여도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붕세권’이라는 말도 나에게는 그저 조금 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겐 계절의 즐거움이지만, 나에게는 슬픔을 건드리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작년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붕어빵 트럭이 보이면 예전처럼 애써 외면하지 않고, 슬그머니 시선을 두어 보았다. 여전히 오래 바라보면 눈물이 날 것 같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바로 오열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올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이제는 붕어빵을 직접 사 먹는 것까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빠 기일날, 어제 아빠한테 가져갈 붕어빵을 미리 샀다. 동네에서 세 개에 이천 원이길래 여섯 개를 샀는데, 들고 오다 보니 문득 너무 많은가 싶었다. 남편에게 물었더니 많기도 하고, 원래 이런 건 홀수로 사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주차장에서 홀수로 맞추겠다며 슈크림 붕어빵 하나를 제가 호로록 먹어버렸다. 너무 얼떨결에 먹어서였는지,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섯 개가 된 붕어빵을 들고 가족들과 함께 아빠를 만나러 갔다. 엄마가 준비한 음식들 사이에 내가 사 간 붕어빵도 함께 놓고, 아빠한테 말했다.


아빠가 좋아하는 붕어빵 사 왔다고. 슈크림 반, 팥 반이라고. 앞으로도 매년 사 올 테니 맛있게 드시라고.


그 말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오늘 나는 또 하나를 건넜다. 붕어빵을 극복한 것이다.

아빠는 수목장을 했는데, 예전보다 더 푸르게 자란 아빠 나무를 보니 마음이 참 좋았다. 나무는 조용히 자라고 있었고, 나도 우리도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지나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모양이 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어떤 날은 크리미빵 하나로, 어떤 날은 붕어빵 몇 개로. 우리는 그렇게 아빠를 잊지 않은 채, 아빠가 없는 시간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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