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cturne in Black and Gold, 1875
평론가로 잘 알려진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과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가 펼쳤던 논쟁에 대한 것이다. 러스킨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에서 활동한 작가, 철학가, 그리고 미술 평론가였으며, 휘슬러는 영국 기반 미국 태생 화가였다. 이 둘의 논쟁의 중심에는 바로 휘슬러의 1875년 작품인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로켓>과 <푸른색과 금색의 녹턴: 오래된 배터시 다리>가 있었다.
영롱한 새벽 밤하늘의 노란 불빛인가? 흩날리는 불꽃처럼 휘날리는 노란색 안료들이 캔버스 위로 불규칙하게 퍼지면서 빛의 향연을 펼친다. 짙은 밤의 모래사장 넘어 잔잔한 파도 위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물속으로 표면으로 반사되어 더욱 반짝인다. 오른쪽 작품은 아직 해는 떠 있는 시간대로 보인다. 쓸쓸하게 배 위에 서있는 그림자진 한 남자의 뒷모습 위로 별들과 건물의 빛들이 어우러진다. 화면의 비율은 다리의 묵직함으로 분리되면서 균형을 이룬다.
이 모든 것은 1878년 11월 25일 휘슬러가 평론가 러스킨을 명예 훼손죄로 고소하면서 출발한다. 당시 이 사건은 당시 최고의 평론가와 신진 작가였던 화가가 싸웠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자신의 그림들에 대한 러스킨의 강력한 비판에 대해 깊은 분노를 느꼈다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1877년 7월 Fors Clavigera라는 그의 뉴스레터에, 런던의 Grosvenor Gallery에서 열렸던 전시회에 대한 구절을 출판하였다. 당시 러스킨이 휘슬러의 그림에 대해 비평했던 영어 원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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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any other pictures of the modern schools: their eccentricities are almost always in some degree forced; and their imperfections gratuitously, if not impertinently, indulged. For Mr. Whistler’s own sake, no less than for the protection of the purchaser, Sir Coutts Lindsay ought not to have admitted works into the gallery in which the ill-educated conceit of the artist so nearly approached the aspect of wilful imposture. I have seen, and heard, much of Cockney impudence before now; but never expected to hear a coxcomb ask two hundred guineas for flinging a pot of paint in the public’s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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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입은 휘슬러는 명예훼손으로 그를 고소할 수밖에 없었고, 러스킨은 이 스캔들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 미의 정의는 시대마다 변화했지만, 19세기 휘슬러의 회화적 표현 방식은 당시 전통 예술가와 이를 극찬하는 예술 분야 평론가들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점차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으며, 기계혁명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사진기의 발명은 점점 화가들의 입지를 위태롭게 했다. 이들의 표현의 자유는 점점 그 영역을 확장했고, 휘슬러 역시 그 중심에 있었던 화가였다. 그의 작품들은 한눈에 보아도 뚜렷한 물체나 형상이 없으며, 추상적으로 모호하게 표현된 장면이 많았다.
특히 그는 유럽에서 전형적인 미술을 공부하면서 일본 예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자포니즘(Japonism) 예술에서 나타나는 대칭적 구성, 표면, 패턴들을 자신의 표현 방식에 흡수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선형적인 것, 평면적인 것, 그리고 이들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곧 유럽의 음악과 연결되었다. 그의 자유로운 표현은 추상적이면서 심리적인 분열로 발전하면서, 더 이상 예술을 위한 예술의 어떠한 도덕적인 가치나 메시지를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전통적인 미적 요소들의 형태가 분리되면서 모호해지는 표현은 휘슬러 자신만의 영역을 창조한 것이다.
터너(J. M. W. Turner, 1775 ~ 1851)에 영향을 받았던 러스킨은 그에게 있어 예술이야말로 그 도덕적 가치가 명확했으며 교훈적이어야 하고, 진실성과 정직성이 확보되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예술이란 자연에 충실해야 하며 예술가만의 장인정신으로 그 본질과 진실에 도달해야 했다. 이것이 명확한 메시지와 가치가 요구된다고 보았다.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다는 라파엘 전파의 옹호자이기도 했던 그는 장인 정신과도 같은 중세 예술 혹은 풍경화들이야말로 고귀한 주제를 표현한다고 믿었으며, 특히 종교적 측면과 낭만적인 테마와 그 가치들에 관심이 있었다.
이들의 싸움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논쟁이었을 테다. 역사는 늘 그래왔으며, 변화와 수렴을 반복해 왔다. 전통을 깨고 형태의 순수함을 믿었던 깨려는 자, 그리고 전통과 도덕적인 판단을 신뢰했던 지키려는 자 역시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