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일상 1
양산박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었지만, 나와 함께 테이블 청소를 담당하던 콜롬비아 직원처럼 일부는 외국인을 쓰기도 했다. 하루는 홀 서빙을 담당하는 베트남 직원이 다른 직원들에게 떡을 돌렸다. 그녀가 잠시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양산박으로 복귀한 날이었는데, 베트남에 무슨 명절이었다나. 그녀가 건네준 떡은 초콜릿바처럼 작게 낱개로 포장되어 있었고 갈색의, 식감이 아주 쫀득쪽득한 떡이었는데 마치 보기에는 한국의 시루떡 같았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떡을 받아 들고 기분 좋게 귀가하여,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내일은 시프트가 없는 쉬는 날이었고, 동시에 내 생일이기도 했다. 늘어지게 늦잠이나 잘 계획을 머릿속에 세우고 있었고, 별생각 없이 떡을 베어 물었다. 쫀득쫀득하고 달콤했다. '괜찮네'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와드득하고 무언가 입안에서 씹히는 소리와 함께 바삭바삭한 식감이 느껴졌다.
'베트남에서는 떡에 땅콩도 넣나 보네?' 땅콩 풍미가 강하지는 않았다. 떡을 다 먹고 난 후,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오른쪽 아래 이빨에서 찌릿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도통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에 이빨 부분을 비춰보니, 구멍이 뻥 뚫려있었고 안쪽으로 분홍빛 잇몸 부분이 선명히 보였다. 충치치료를 해 놓았던 레진 인레이가 떡에 붙어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바삭바삭한 식감의 원인은 떨어져 나온 내 인레이였다.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다행히 이빨이 깨진 것 같지는 않고, 단순히 인레이만 깔끔하게 떨어져 나온 것 같았다. 퇴근하고 집에 온 시간은 이미 밤 10시가 넘었고, 지금 문을 연 치과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래도 내일 치과에 가는 수밖에 없지? 그리고 동시에 '이거 보험적용이 되나?' 하는 걱정이 들이쳤다.
우선 급하게 치과를 찾았다. 인레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야, 호주에서도 분명 흔하게 발생하는 사고일 것이라, 굳이 한국인 의사나 치위생사가 있는 치과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구글링 끝에 서큘러 키(Circular quay) 역 근처에 한 치과를 찾을 수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추천해 준 치과였는데,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고 꼼꼼하게 진료 봐주신다고 하니, 뭐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저장하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오전, 이가 시려서 늦잠 자기에는 글러버렸고 일찍이 일어나 치과에 갈 준비를 했다. 치과는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전반적으로는 한국의 치과들과 크게 다른 느낌은 받지 못했다. 접수처로 가서 접수를 마치고, 십 여분을 기다리니 안 쪽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내가 방문한 치과는 그렇게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방마다 진료 의자가 한 개씩만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안내받은 의자에 앉았고, 곧이어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의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이 쪽에(오른쪽 아래 이빨을 가리켰다) 인레이가 빠졌어요."
"네, 확인해 볼게요. 입 벌려 주실래요?... 다행히 깨진 것은 아니고, 인레이만 빠진 것 같네요. 바로 치료하실 건가요?"
"네, 바로 해주세요."
"네 좋습니다."
치료 준비를 위해 의사 선생님은 잠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혹시 가수 누구 좋아하세요?"
가수? 치아 치료에 가수가 웬 말인가? 의문이 솟았지만, 바쁘게 준비하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에 차마 이유는 묻지 못하고(심지어 나는 계속 의자 위에 누워있었다!) 얼떨결에 머릿속에 그냥 떠오른 가수를 말했다.
"음.. 시아(Sia)요."
"좋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방의 창틀 쪽 선반에 위치한 스피커에서 LSD(시아가 활동하는 그룹이다)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치료 중에 노래를 틀어주다니! 그것도 환자가 좋아하는 가수 노래를? 한국에서는 겪기 힘든 경험이라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환자를 배려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방마다 진료 의자가 하나씩밖에 없으니,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충치 치료를 받아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보통 인레이 치료를 하게 되면 먼저 본을 뜨고, 임시 재료로 구멍 난 부분을 채워놓는다. 일주일 정도 기다린 뒤 인레이가 완성되면 다시 치과에 방문하여 임시 재료를 꺼내고 완성된 인레이로 대체하여 삽입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내가 받은 치료는, 당황스럽게도 본을 뜨는 과정을 아예 생략해 버리고, 바로 레진 인레이를 채워 넣어 치료를 진행했다. 의사 선생님은 심지어 내 윗니를 눈으로 보면서(!) 윗니와 맞닿는 인레이 부분을 정교하게 깎아냈다.
“입을 한 번 다물어 보세요. 어떤가요 불편한 부분이나, 윗 이빨과 잘 안 맞는 부분이 있나요”
“어..(나는 딱딱거리며 몇 번 이빨을 부딪혀 보았다) 크게 불편한 부분은 없어요”
“네, 좋습니다!“
“… 이게 끝인 거예요?”
“네! 끝났어요! 간단하게 금방 끝났죠?”
의기양양하고 자신감 넘치는 선생님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진료실에서 나왔다. 한국에서 일주일 이상 걸리는 게 한 시간 만에 끝나버렸네.
진료를 마치고 대기실에서 몇 분 기다리자, 리셉션 직원이 나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치료는 어떠셨어요?”
“네… 뭐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당황스럽긴 한데, 그래도 잘 된 것 같아요.“
“하하. 좋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진료비 청구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치료비는 총 366달러예요.”
“아, 네. 이거 혹시, 보험처리는 안 되나요?“
“어떤 보험에 가입되어 있으세요?”
“어시스트 카드(Assist card)요.”
“아~, 여기서 우선 결제를 하시고, 청구서를 보험사 쪽에 제출하면 보험료를 당신께 직접 지급할 거예요. 그런데 오늘 치료받으신 게 치아 파절이 아니라 단순히 떨어진 인레이를 채운 거라서, 보험 처리가 될지 모르겠네요.“
“아 그렇군요. 그래도 신청은 해 봐야죠. 카드로 지불할게요”
“좋아요! 여기에 카드결제 사인해 주세요. 오후에는 뭐 하실 계획이세요?”
“음… 그냥 집에 가서 쉬려구요.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그런데 뭘 특별히 할 기분은 아니네요.“
“오 생일 축하해요! 이빨은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카드를 돌려주며) 좋은 하루 되세요.“
“네, 당신도요.“
치과를 나서서 집에 돌아왔다. 생일날 이게 당최 무슨 일인가 싶다가도, 그래도 호주에 와서 색다른 경험을 한 셈 치기로 하였다.
여담으로, 그날 바로 보험사에 치료비 청구 신청을 하였고, 며칠 지나 메일로 답변을 받았다.
“본 진료는 보험 처리가 가능한 실질적 상해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어, 진료비 지급이 불가함”
아, 내 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