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금만 짧게 해 주세요.

시드니 일상 2

by 지안

호주생활에서 나에게 헤어스타일이란 참으로 계륵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머리를 안 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르자니 당장 이발할 때 쓰는 영단어들도 잘 모르거니와, 모질도 뻗치는 직모라서 한국(또는 최소 동아시아권) 디자이너들 말고는 거의 이발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호주로 입국하기 직전에 머리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머리를 꽤 짧게 깎았다. 하지만 그것도 겨우 두어 달 버틸 수 있었고, 슬슬 머리카락이 길어 생활하기 불편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당시 투블럭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안 쪽으로 깎아낸 머리는 길이가 점점 길어져 밤송이처럼 뻗치기 시작했고, 앞머리는 길다 못해 코 아래까지 내려오기 직전이었다. 더 이상 머리 깎는 걸 미룰 수 없었다.


무슨 오기였을까. '그래도 호주에 왔으니 현지 바버샵에서 이발해봐야 하지 않겠어!' 하는 마음과 함께, 나는 집 근처의 바버샵을 검색하였다. 당시 나는 레드펀(Redfern) 역 근처에 살고 있었고, 역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바버샵이 하나 있었다.




시프트가 없던 어느 날 오전, 나는 찾아두었던 역 근처의 바버샵을 방문했다. 7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 벽에 걸려있는 각종 헤어모델 사진들, 좌석 3개, 거울 3개, 기다리는 손님을 위한 작은 테이블과 의자 2개. 미용실 안쪽 공간으로 커튼이 처져 있었고, 커튼 안쪽으로는 머리를 감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작은 한국 미용실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Hello"

"Hello"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발을 하고 있는 젊은 손님 1명과 대기용 의자에 앉은 노년의 신사 1명, 그리고 이발사가 보였다. 이발사는 키는 나와 비슷했고,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아저씨였다. 나는 대기하는 손님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옆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여기서 기다리면 될까요?"

"네."

"얼마나 걸려요?"

"한 20분쯤이요."


이발사는 생각보다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5분쯤 대기하자 이발을 마친 젊은 손님이 일어났고, 30분쯤 더 기다리자 내 앞에 기다리고 있던 신사분도 이발을 마쳤다.


마침내 내 차례, 나는 약간 긴장을 하면서 안내받은 차리에 앉았다. 이발사는 동양인이 익숙하지 않은지, 약간의 난색을 띤 얼굴을 하고 물었다.


"머리는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일단은 언더컷(Undercut)된 옆, 뒷머리 부분을 클리퍼(바리깡)로 깎아주세요."

"길이는요?"

"9mm로요."


위잉. 바리깡으로 머리를 깔끔하게 잘랐다. 이 부분은 크게 어려운 것 같지 않군.


"더 잘라드릴까요?"

"아뇨, 언더컷 된 부분은 이제 됐어요. 앞머리와 옆머리 길이를 조금 다듬고 싶은데요."

"... 네?"


어라? 이발사는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trim my hair'이라고 말했는데, 잘못된 표현이었을까), 동시에 그도, 나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바버샵에 오기 전에 간단한 이발 관련 영단어 유튜브 영상이라도 보고 올걸.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결국 원시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머리와 옆머리를 조금만 짧게 해 주세요(Shorten a little bit)."

"아, Okay."


이발사는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첫 가위질 한 번, 사각.

그 순간, 아뿔싸 '망한 것 같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결과적으로 옆머리를 너무 짧게 잘렸다. 보통 곱슬머리이거나, 머리에 힘이 없는 경우에는 약간 짧은 정도야 큰 문제가 안되지만, 문제는 내가 너무 억센 직모라는 점이다. 가위질이 끝나는 즉시 옆머리가 붕 뜨기 시작했고, 정면의 거울을 보니 마치 버섯 같은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게 뭐람! 이발사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았는지 가위로 이리저리 더 잘라보려 하였는데, 내가 그만 잘라도 괜찮다고,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호주의 미용실은 머리를 감겨주는 것에 대해 추가요금을 받는다. 당연히 이 바버샵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를 감겨줄까요? 추가 금액이 있어요."

"아뇨, 전 이걸로 됐습니다."


얼른 돈을 지불하고 바버샵을 빠져나왔다. 현지 바버샵을 가다니 이 무슨 안일한 결정이었나, 좀 더 숙고해 볼 것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화장실 거울로 본 내 모습은 (좋게 말하자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이거 복구가 될까?' '다른 한국인 미용사에게 가서 조금만이라도 자연스럽게 다듬어 달라고 이야기라도 해 보아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결국 네이버에 시드니 한인 미용실을 검색하여 수섹스 스트리트(Sussex St.)에 위치한 미용실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그 미용실로 출발하였다.


수섹스 스트리트에 위치한 미용실은 큰 상가 건물의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스트리트 자체가 차이나 타운 근처여서 그런지, 각 종 중국어 간판이 많이 보였다. 이번 미용실은 아까의 바버샵과 크기는 비슷했는데, 한쪽 면이 통유리로 되어 내부가 비춰보였다. 인테리어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피부가 약간 어두운, 그러나 확실히 동양인이 사람이 나를 맞아주었다.


"Hello"

"Hello"

"머리 자르러 오셨나요?"

"네"

"네, 여기에 앉으세요."

"아, 혹시. 여기 한국인 디자이너가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인 디자이너에게 서비스를 받아도 괜찮을까요?"

"아, 그분은 오늘 일찍 퇴근하셨어요. 3시쯤?"


시간은 이미 4시가 넘어있었다. 내가 난색을 표하자 그는 친절히 다른 시간을 예약할 수 있다면서, 한국인 디자이너가 출근하는 요일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나는 당장 내일 출근해야 했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머리로 출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에게 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자를 벗었고, 그는 내 머리를 훑어보더니 약간 당황한 듯했다. 아무래도 내 머리가 이미 꽤 짧게 깎여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머리가 이렇게 된 사정을 그에게 설명하였다.


"로컬 바버샵에 방문했는데, 머리를 좀 잘 못 자르게 됐어요."

"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현지 사람들은 동양인 모질에 대해 잘 모르긴 하죠."

"네... 지금 옆머리가 너무 짧아서 버섯처럼 뜨는데,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이미 머리가 너무 짧아서... 가라앉힐 수는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여기서 머리를 조금 더 짧게 잘아야 해요."

"네 머리가 내려오면 돼요. 할 수 있는 뭐든지 해주세요."


그는 내 머리를 정성껏 다듬어 주었고. 결과적으로 꽤 짧긴 하지만, 조금 덜 어색한 수준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다!


이후 난 머리를 자를 때마다 수섹스 스트리트의 미용실에 방문했다. 한국 미용실들에 비해서는 조금 만족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랴. 해외에서 그만한 미용사를 찾을 시간과 여유가 많지 않았다.




나는 호주에서 여행을 이곳저곳 다녔다(여행기도 추후 브런치에 업로드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라!). 뉴질랜드 여행을 앞둔 어느 날, 헤어스타일을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많이 찍을 테고 무엇보다 여행을 가는 기분을 내고 싶었다.


평소에 가던 미용실에서는 남자 펌에 익숙지 않은 것 같아, 새로운 미용실을 찾아보았다(물론 네이버검색의 힘을 빌렸다). 이리저리 블로그를 뒤진 결과, 실력이 꽤 있어 보이는 한국인 디자이너의 전화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에게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OO님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제가 머리를 좀 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아~ 네, 언제가 괜찮으세요?”

“이번 주 수요일 4시에 예약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혹시 정확한 주소가 어디인가요? 인터넷에는 대략적인 장소만 나와서요.”

“아, 저희가 최근에 이사를 했어요. 미용실은 로즈(Rhodes)에 있어요”


로즈? 가끔 시드니 지하철 지도앱에서나 보던 생소한 지명이었다. 위치는 시드니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쪽으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알겠습니다. 정확한 주소 좀 이 번호 문자로 보내주세요”

“네~”




수요일 당일, 머리를 하러 로즈에 도착했다. 로즈는 파라마타 강(시드니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다)의 중류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고, 뭐랄까… 굉장히 신도시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비슷한 모양으로 여러 채 지어진 아파트와 빌라,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한가한 분위기,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 그리고 그 옆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강. 안전하고 조용한, 딱 살기 좋은 주거지였다. 그런데 상가는 보이지 않았다.


문자로 받은 주소에 도착해 보니, 한 아파트 단지 아래였다. 미용실이 있을 법한 곳이 아닌데? 의문을 품으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4시에 예약했던 사람인데요, 알려주신 주소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여기 무슨 아파트 앞인데, 여기 위치 맞나요?”

“아 네네, 저희 직원이 데리러 내려갈 거예요~”


5분 정도 기다리니 앳되 보이는 직원 분이 내려와 나를 맞아주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미용실은 아파트를 개량하여 쓰고 있었다. 30평 정도로 보이는 집에, 거실에는 손님용 좌석 하나, 부엌에는 각종 헤어도구들과 약품들, 거실 안 쪽에는 흰 테이블과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외의 가구는 일절 없어서 전반적으로 뻥 뚫려 보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는데, 거실 바깥으로 부채꼴 모양의 기다란 베란다와 창문이 있었고 창 밖으로는 파라마타 강과 건너편의 녹지가 훤히 보였다는 점이다. ‘와,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곳이었다.


로즈(Rhodes)의 한 아파트에서 발코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Jian
푸른 하늘, 파라마타 강, 싱그러운 공원 ©Jian


집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 커트가 진행 중인 남학생과, 학생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계셨다. 학생은 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수줍음이 많은지 말은 거의 하지 않고 커트를 받고 있었고, 반대로 어머니는 수다쟁이였는데, 아들의 머리에 대해 이것저것 디자이너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거실 안쪽의 의자에 앉아 10분 정도 기다리니 학생의 커트가 끝났고, 곧이어 내 차례가 되었다.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가르마 스타일로 펌 하려고요.”


나는 미리 준비한 사진을 디자이너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사진을 보고 내 머리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대화를 이어갔다.


“머리가 엄청 직모시네요, 숱도 많고.”

“맞아요, 기르는 속도도 빨라서 매번 불편하네요.”

“그러실 것 같아요. 지금 그런데, 펌을 하기에는 머리 길이가 약간 부족한 상태예요. 앞머리 옆머리 길이 자체는 괜찮은데, 머리에 층이 져 있어서. 최근에 언제 머리 하셨어요?”

“두 달쯤 전에 했어요.”

“그때 커트 하실 때 아마 그 디자이너 분이 층을 내서 자르신 것 같아요.”


그는 정수리 부분에서 시작하는 내 머리와, 이마 부분에서 시작하는 내 머리를 번갈아 들어 올리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보시면 정수리 부분에서 내려오는 머리 길이가 짧죠? 이마까지밖에 안 와요. 반대로 이마에서 내려오는 머리는 코 중간 부분까지 내려오구요. 보통 이러면 펌 끝나고 예쁘게 모양이 잡히기보다 약간 뜨는 경향이 있어요.”

“아 그래요? 그러면 펌은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보여주신 사진과는 약간 느낌이 다를 수는 있어요. 그래도 가르마 스타일로 펌이 나오긴 할 거예요. 한다고 하시면 제가 말면서 최대한 눌러볼게요. 어떻게... 진행하실래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모습에 신뢰가 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여행 날짜까지 시간도 촉박하여, 새 미용실을 찾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그냥 진행하는 것으로 하였다.




디자이너와 조수분이 함께 내 머리를 말아주었고, 약품 처리를 하고, 헤어캡을 씌웠다. 시간은 어느새 5시가 넘었다. 한국에서 펌을 할 때는 보통 머리를 말고 열처리를 하였는데, 이곳은 열처리는 하지 않고 그냥 대기하라고 하여, 나는 거실 안쪽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디자이너는 내 머리를 말아준 후 펌 약품과 도구들을 적당히 정리하더니,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조수에게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있는 나에게 “저희 저녁 먹고 올게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지? 작업장에 손님만 남겨두고 직원들이 나가는 건 무슨 경우일까. 그렇게 나는 헤어캡이 씌워진 채 집 안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차피 펌 때문에 기다려야 하니까’ 하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그래도 혼자 남으니, 눈으로만 보고 있었던 발코니 밖 풍경 사진은 마음껏 찍을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디자이너와 조수분이 돌아왔고, 말아놓은 머리를 풀고 샴푸를 진행했다. 펌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만족스럽게 나왔다. ‘실력은 확실하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지불하고 아파트에서 나와 역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어딘가 오묘하고 찝찝한 여운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