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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껍질

시드니 일상 3

by 지안

누구나 살다 보면 가끔 평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스스로조차 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곤 한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울월스(Woolworths)*에서 맛있어 보이는 과일을 사다 먹는 것이었다.

*호주의 유명 대형마트 체인점


당시 나는 BRCQ에서 일하고 있었고, 살벌한 시드니 대중교통비를 조금이라고 경감해 보고자 집이 있는 레드펀(Redfern) 역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걷다 보면 시드니 시내를 완전히 관통할 수 있었다. 시드니 시내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타운홀(Town Hall) 역 근처에는 큰 울월스가 있었고, 나는 걸어 다니며 자주 그 울월스에 들러서 생필품과 과자 등을 사기도 했다.


매일 기름진 인스턴트 음식과 대충 때우는 간편식들이 질려 갈 때쯤, 나는 문득 과일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 과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유독 신선하고 상큼한 무언가가 땡겼다. 울월스에는 다양한 과일들도 판매하고 있었고, 나는 수박, 복숭아, 사과, 체리 등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느지막이 저녁을 먹고, 설레는 마음으로 과일들을 씻었다. 수박, 복숭아, 사과를 우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고, 체리 꼭지를 따서 수박과 함께 플라스틱 통에 넣었다. 그리고 복숭아와 사과 껍질도 깎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마스터가 방에서 나와 과도를 사용해도 괜찮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과도를 마스터에게 넘겨주었고, 남은 과일들을 체리와 수박이 담긴 통에 넣고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과일들을 맛있게 해치우고, 잠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이 날은 BRCQ 오픈 담당을 하는 날이었기에, 일찍이 일어나 출근을 하였다. 10시에 가게를 오픈하였고, 11시쯤 되자 몸 컨디션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멀미가 조금씩 일었고, 12시가 되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점점 몸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은 싸한 느낌도 함께 들었다. 12시 반쯤 되자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고, 나는 매니저에게 몸상태를 설명하고 일찍 퇴근하였다(사장님이 대신 가게에 나와 업무를 맡아주었다).


집까지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기로 하였다. 몸에서 오한이 일긴 했지만, 감기 같은 거겠지 싶어 병원은 따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나는 당시 보통 몸살감기도 하루정도 푹 쉬면 충분히 나아서, 병원에 잘 가지 않았다). 다만, 몸살에 듣는 감기약은 하나 사야겠다 싶어 약국에 들렀다. 집 근처 약국을 검색해 본 결과, 레드펀 역 근처에는 적당한 약국이 보이지 않아서 한 정거장 전인 센트럴(Central) 역에서 내려, 프라이스라인 약국(Priceline pharmacy)에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감기약 하나만 추천해 주시겠어요?"

"네, 혹시 증상이 어떠세요?"

"열이 조금 있고, 몸이 떨려요, 그리고 약간 어지러워요."


직원은 해열제를 하나 추천해 주었다.


"또 필요한 것 없으세요? 우리 가게에는, 병을 직접적으로 낫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면역력을 높여줄 수 있는 비타민제도 판매하고 있는데, 어때요?"

"아뇨, 해열제만 사겠습니다."


업세일링을 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집으로 걸어갔다.




오후 2시 반쯤 집에 도착해 샤워로 땀을 씻어내고, 약을 입에 털어넣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집에 오는 동안 점점 울렁거림이 심해져 왔고,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불을 덮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저녁 7시쯤, 룸메이트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에 잠깐 잠에서 깼다. 몸이 엄청나게 떨리는 것을 느꼈고, 등에 땀이 흥건했다. 일어난 김에 수건을 물에 적셔 몸을 닦고, 잠옷을 갈아입고 다시 잠에 들었다.


새벽 1시쯤, 다시 잠에서 깼다. 머리가 어지러워 세상이 핑핑 돌고 있는 것 같았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뒤척일 수조차 없었다). 등과 침대보가 땀으로 흥건한 것을 알아차렸지만, 도저히 어떻게 할 정신이 없었다. 다시 잠에 들었다.


새벽 6시쯤, 또 잠에서 깼다. 어지럼증이 많이 나아졌고, 몸은 한밤중보다는 조금 덜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증상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몸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꼈다.


오전 10시, 스무 시간 가까이 침대에 누워있었더니 허리가 너무 아프고 도저히 더 누워있을 수가 없어서 깼다. 창 밖으로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어지럼증은 마침내 거의 가셨고, 몸이 추위에 떨리는 것도 멈췄다. 다만 계속 누워있어서 힘이 빠졌는지, 아니면 자는 동안 전혀 먹지 못해서 그런지 손이 약간씩 떨렸다.


이 날은 오후 3시 출근 예정이었어서, 오전에 여유 시간이 좀 있었다. 집에서 씻고 나와 근처 마트에 가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고 돌아왔다. 밖에서 바람도 쐬고 볕도 받으니 몸이 점점 괜찮아져 갔다. 손떨림도 다행히 금방 멈췄다. 오후 즈음에는 컨디션을 거의 회복해서 출근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날 과일 껍질을 깎지 않고 그냥 먹은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왜 껍질을 깎지 않았지? 이렇게 큰 대륙에서 수확하는 과일들은 당연히 약처리를 엄청나게 했을 텐데.


아마도 당시 내 인식 속의 호주가 아주 깨끗한 자연을 가진 무해한 장소였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보다 생수를 사 먹지 않고 수돗물을 그대로 받아 마신다는 점이 그러한 나의 편견을 더욱 확고히 만들었다. 과일 껍질도 그냥 먹어도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날 먹은 과일 껍질이 몸이 아픈 진짜 원인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도저히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과일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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