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

그 사랑의 정도는 누가 정하는 걸까?

by 지안의 문장


결혼을 약속하고,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구했던 밤이었다. 우리의 계획을 전하고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설렘이 가득한 가운데, 나는 한 통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아낌없이 사랑을 준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글이었다. 그런데 그 안의 한 문장이, 나의 모든 설렘을 무너뜨렸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길 바랐단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인 걸까? 이 말의 의미를 밤새도록 곱씹었다. 이 말을 내게 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대체 누가, 내가 받은 사랑의 양을 저울질할 수 있는 걸까. 생각의 끝은 베개를 적시는 눈물로 마무리되곤 했다.


만약 태어날 아기에게 부모를 선택할 결정권이 있다면, 당연히 ‘사랑 많고 화목하며 안정적인 부모’를 원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을 테니까. 내 삶의 시작은 내가 결정할 수 없었고, 부모님의 이혼과 기나긴 외로움의 시간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 시절의 나는, 분명 사랑의 결핍을 느끼며 자랐다.


하지만 어렵게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가 생기기도 전부터 우리는 아이에 대한 사랑을 꿈꾸었다. 어떤 좋은 부모가 될지, 아이는 누구를 닮을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소원이 없겠다며.


아이가 태어나서는 더했다.

행여나 아플까, 배고플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웃을까, 더 많이 안아줘야지.


‘사랑한다. 매일 매 순간 네가 있어 행복하단다.

우리에게 와주어 고맙고, 정말 사랑해.’


마음속에 담고 또 담아도 모자란, 넘쳐흐르는 사랑이었다.


아마 나의 엄마와 아빠도 그러했으리라.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스물다섯의 나이에 아기를 낳아, 그 서툰 어른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고단함이 더해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나를 사랑으로 키워냈으리라. 비록 각자의 사정으로 나의 어린 시절이 외로웠을지라도, 그때 받은 사랑의 온기는 분명 내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타인에게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섣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 설령 결핍의 시간이 있었을지라도,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존재는 이미 “충분한 사랑” 그 자체이니까.


물론, 굴곡 없는 시절을 보낸 사람이 내면이 더 튼튼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에게나 상처와 고민은 있고, 자신의 경험 속에서 또 단단해지는 것이 인생이니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결핍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부족했다면, 내가 나를 ‘스스로 사랑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고단했을 텐데, 이렇게 잘 자라주어 대견하다.”

“네가 어쩔 수 없었던 일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란다.”

“너는 충분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야. 너는 소중해.”


나는 편지를 내려놓고, 지난날의 나를 가만히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니 너는 충분한 사랑이야.”


나의 결혼 전야의 시간들은 그렇게 슬픔과 위로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곁에는, 나의 모든 이야기를 잠잠히 들어주고 따스하게 안아주는 그가 있었다. 그의 사랑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의 말로 내 사랑을 재단하는 대신, 나의 결핍까지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른의 사랑이란,

서로의 결핍을 부둥켜안고 아껴주며 함께 더 단단해지는 것임을,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keyword
이전 21화희망고문 (Torturous Hope)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