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고문 (Torturous Hope) 2

멈추지 않는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었지만

by 지안의 문장


우연히 만난 대학교 선배는 내게 '연극 수업 강사'라는, 글을 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소개해 주었다. 발표 울렁증이 있는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는 걸 이미 겪어봤기에 마음먹으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극 강사 일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모든 걸 스스로 기획하고 연출해서 완성해야 한다는 점이, 대학 시절 줄기차게 해 왔던 과정과 닮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할 순 없었다.


"언니, 저희끼리 워크숍 하는데 같이해요.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함께 일하는 동료의 고마운 제안 덕분에, 나는 베테랑 강사들의 수업 시연을 보며 현장의 소리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연극 수업이 정말 좋은 일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밥벌이를 차근차근 이뤄내고 있을 무렵, 나의 본업인 뮤지컬 아카데미에서의 시간은 '도장 깨기'에 가까웠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 시간은 나를 갉아먹었다. 작품에 애정을 쏟을 시간도 없이 마감에 쫓겼고, 멘토들의 조언을 모두 담으려다 보니 내 목소리는 사라졌다. 팀원들과의 분열, 서로에게 일을 미루는 듯한 불편한 공기 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이렇게 쓰려고 도전한 게 아닌데… 또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희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다른 벽에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작품은 완성되었지만, 작가로서 우유부단했던 나의 태도는 모든 좋은 재료를 섞어놓은 맛없는 비빔밥 같은 결과물을 낳았다. 결국 고대하던 만큼 좋은 결과는 없었고, 나는 혼자만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빠져 도망치고 말았다.


내가 숨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다. 정작 제대로 해야 할 건 제쳐두고, 나는 다시 먹고살기에 급급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잘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 역시 치열하게 뛰어다녔다. 오전부터 밤까지 브랜드 상품을 판매하고, 부매니저라는 직책의 무게를 견뎠다. 집에 도착한 밤 11시부터는 웹툰 대본을 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의 희망도 매일 밤을 쌓아가다 보면 가까워질 것 같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더디기만 했다.


"지도 교수님이 잘 완성하면 그림 작가랑 협업해서 플랫폼 연재 기회를 만들어 본대요."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함께 피로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노트북을 두드리며 '조금만 더 해보자'를 수없이 외쳤다. 하지만 분명 앞으로 가고 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는 상황은 서서히 우리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어느 날 밤, 작업을 마치고 만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엔 내가 모르는 고단함이, 내 얼굴엔 그가 모르는 좌절감이 새겨져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지친 마음을 보았다.


더디고 더딘 하루들을 반복하다 보면, '길을 잘못 들어선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스스로를 잠식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우리가 그랬다. 나는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잠시 쉬어가는 건 어때? 다시 쓸 힘도 필요한 것 같아.”


단 한 번도 쉴 생각을 해본 적 없던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어쩌면 도피처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될까?”


그의 대답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멈추면 도태되는 거 아닐까?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몰라. 알려지지 않은 작가 지망생으로 남으면, 그동안의 우린 뭐가 되는 거지?' 우리는 스스로를 낙오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열심히 해도 안 될 때도 있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야 둘 다 살 수 있었다.


“저번에 나한테 연극 강사 일 소개해준 선배가, 다른 일자리 알아봐 준댔는데, 좀 더 안정적일 거야. 선배가 한번 해볼래?”


'안정적이다'는 말에 목말라 있던 그는, 나와의 미래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의 치열했던 20대는 타올랐다가, 30대를 만나며 잠시 식혀졌다.


'정말 멈추지 않는다고 모든 게 다 이뤄지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이뤄지지 않고도 살아가는 법을, 원하는 걸 갖지 못해도 평범함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법을. 특별해지지 않으면 무너질 것만 같았던 일상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 안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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