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명량해전을 앞두고 한 비장한 각오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되면, 차라리 마음속에 이혼을 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실제 이혼을 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혼을 쉽게 한 사람은 없을 거다. 아무리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일거다. 결혼이 가족과의 결합이라면, 이혼은 가족과의 결별이다. 이혼을 앞두고 하는 고민은 다양하다.
우선, 우리는 결혼식에서 혼인서약서를 낭독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혼을 한다는 건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그 약속을 깨는 행위다. 일가친척과 지인들이 하나 둘 나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부모님께서 속상하실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든다. 부부 사이에 자식이 있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을 결심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와의 관계가 끝이 보인다면 이혼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나 방법도 떠오른다. 붙잡고 있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에 갇히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다. 오히려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냉철하게 다시 판단해 보려면, 이혼까지 생각해야 한다.
이혼소송으로 가지 않고 협의이혼을 하더라도 이혼숙려기간을 거쳐야 한다. 부부는 일정기간이 지난 후 법원의 이혼의사 확인을 받아야 이혼할 수 있다. 민법 제836조의2(이혼의 절차)에 규정되어 있다. 무려 “법”에서 정해놓은 기간이다. 이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의할 것들이 많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많은 것들이 한 데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싸워서 쟁취해 내거나 함께 상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에서 둘로 다시 분리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부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졌다면 이혼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혼을 결심해 보라고 한 의미는 다툴 때마다 섣불리 이혼을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누군가 이혼까지 생각했다는 건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 건드려졌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 부분이 어떤 건지, 타협할 지점이 정말 없는지에 대해 부부가 이야기하게 된다. 즉, 일방 혹은 쌍방이 이혼을 외치면 결혼을 유지할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다시금 확인할 기회가 생긴다.
우리 부부의 관계도 심각하게 좋지 않았을 때가 있다. 나는 남편에게 이혼을 제안했다. 더 이상 둘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각자의 입장에 치우쳐 있어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없었다. 다행히도 우리 사이에는 사랑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노력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카드로 나와 남편은 부부상담을 받았다. 함께 받으면 더 좋았겠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남편은 함께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조차 싫어서 다른 곳을 선택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또 나는 나대로 다른 상담소를 찾아갔고, 각자 결혼생활을 점검받았다. 그리고 서로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 번 상담받은 것이 끝이다. 하지만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상담소를 방문해서 많은 걸 얻어왔다. 지금 우리가 이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의 8할은 전적으로 남편의 몫이다. 상담 과정에서 남편은 자신의 입장을 공감받고,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시댁과 처가댁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배워왔다.
만일 우리가 그때 이혼 위기를 겪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시간이 더 지난 뒤 진짜 이혼을 했을 수도 있다. 이혼은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서로 속마음을 잘 터놓는 부부는 되지 못했을 거다. 고리타분한 속담이지만 이럴 때 딱 들어맞는 구절이 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 정말 그렇다.
위기를 극복했다고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부부가 이혼위기를 겪으면 그 과정에서 결혼생활에 산재되어 있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확인하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의 “발작 버튼”이 있다. 즉, 상대방에게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면 아무리 착한 사람도 갑자기 흥분하며 화낼 수 있다. 부부는 무조건 싸운다. 정도가 다를 뿐이다. 대신 의미 없는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싸우면서 상대방의 발작 버튼이 무엇인지 하나씩 알아가야 한다.
결국 이혼하면 끝이다. 하지만 결혼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면, 더 신경 써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기는 하는데, 그 굳은 땅 위에는 온갖 지뢰들이 깔려 있다. 그전에는 땅 밑에 숨어 있던 지뢰들이 위기를 겪은 후에는 땅 위로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모르고 밟았지만, 이제는 건드리면 터지는 지뢰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때문에 밟지 않아야 한다. 이제 그 지뢰를 밟으면 같이 죽는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