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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색깔이 왜 이럴까요?

by 백지안




"예쁘게 표현해 보자"

5학년 교실이다. 미술시간이다. 경험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시간이다.

완성하면 밴드에 올릴 테니 더 성의를 갖춰서 하라고 했다. 고학년이라 부모님들의 관심도는 낮은 편이지만 한두 분의 학부모님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로 만족한다는 마음으로 날마다 아이들의 일상을 밴드에 올려 드린다.



이제 교실 안을 한 바퀴 돌면서 아이들의 작업을 살피고 거들기도 한다. 진섭이 앞에서 멈췄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진섭이의 그림은 온통 검은색이다.


진섭이는 그림을 그릴 때나 꾸미기를 할 때나 색깔 표현을 하라고 하면 다 검은색으로 표현한다.



"다른 색깔로도 표현해 봐"


"이 색깔이 좋은데요"


할 말이 없다.




진섭이는 굉장히 똑똑한 아이다. 학습을 할 때 이해력이 빠르고, 짧은 시간 공부하고 퀴즈게임 같은 것을 하면 단연 1등이다.



진섭이는 단골 지각생으로 수업 5분 뒤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들어온다. 뭐든지 게을러서 하기 싫다고 한다. 학기 초에는 매사에 짜증이 심하고 말투의 절반이 욕이었다. 그런데 몇 번 상담을 하면서 보니 심성은 착한 애였다. 뭔가 열 수 없는 감옥에 갇힌 아이처럼 자신에 대한 답답함을 갖고 있었다.


진섭이를 보면 내가 딱 데려가서 키우고 싶은 그런 맘이었다. 저 거친 돌을 조금만 씻고 닦아주면 보석이 될 자질이 충분한데... 아쉬운 마음에 학부모님께 여러 번 전화를 드렸지만 도통 연결이 잘되지 않았다.




일 년간 진섭이를 지도하면서 그 엄마와의 통화는 한두 번에 불과했다. 그것도 지각으로 진섭이가 전혀 연락이 안 될 때였다.



일 년에 1학기와 2학기에 한 번씩 있는 학부모 총회는 전화상담으로 아버님과 하였다.

아버님은 선하신 분으로 진섭이 성품이 왜 착한지 알 수 있었다.





"사춘기인지 도통 말도 잘 안 하고 속을 모르겠어요. 어쩔 때는 답답해서 저도 맘에 없는 큰소리를 진섭이한테 해버리고 후회도 하고 그렇습니다."


"다른 부모님들도 다 그러신답니다. 이 연령대의 남자아이 대하기가 힘든 법이에요. 그렇지만 큰소리치고 후회하는 아빠 마음을 꼭 아이하고 나누셔야 합니다."


"아이고~그런 말 못 합니다~"



진섭이 아빠는 그렇게 당신 맘을 진섭이에게 잘 안 보여주시고 진섭이의 그림 색깔도 일 년 내내 검은색에 머물렀다.



나태한 생활습관이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문제로 느껴져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그 부분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려 버렸다. 언짢으셨을 것이다. 진섭이는 그 부분만 달라진다면 많은 부분에서 성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른도 고치기 힘든 생활습관을 고치기는 참 힘든 일이다.



그래도 진섭이는 갈수록 수업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아이들의 갈등 현장은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교실 분위기를 유연하게 유지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내가 자기를 속으로 이뻐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감은 쉽게 생기지 않았고 항상 쭈뼛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친구를 사귀어도 아주 만만하고 순한 아이하고만 놀았다. 뭐든지 맘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아이임에도 자신의 레벨을 아래 등급에 두고 편안해 하고 있었다.




나는 진섭이라는 진흙 속에 갇힌 보석을 제대로 꺼내주지 못하고 그 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진섭이의 여동생 담임이 되었다.




진섭이 엄마라고는 연결이 안 될 정도의 밝은 목소리, 딸내미를 향하는 꿀 떨어지는 말들,

엄마는 나랑 통화를 하면서 자신에게 진섭이는 버거운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말도 잘 안 듣고 자기가 컨트롤하기가 힘든데 반해 딸은 모든 게 수월해서 딸에게 더 애착이 간다는 것이다.



능력에 비해 매사에 자신 없어 하던 진섭이와는 별개로 그 여동생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한 집안의 같은 부모에게서 자라는 너무 다른 두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했다.


내 아이의 모습은 내가 일정 부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 또한 젊은 날 지혜롭지 못한 양육에 대한 회한이 가슴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 순간에도 우리의 아이들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이 세상에 엄마의 사랑만큼 좋은 약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순간에도 아이에게서 고개를 돌리면 안 된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마음만 먹으면 도처에 배울 수 있는 책과 시설들과 전문가들과 정보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제발 내 아이를 혼자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버거울 때, 아이는 엄마의 어려움을 직관으로 느꼈을 것이다. 엄마가 도와줘야 할 진섭이는 그 어디에서도 엄마 대체재를 찾을 수 없다.


빛나는 색깔을 내면에 품고 있는 능력쟁이 진섭이가 왜 항상 검은 색깔만을 도화지에 토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나서야 할 일임은 분명하다.



누구나 부모 역할을 처음부터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고 공부하면서 노력해가는 거다.


그러면 아이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자기에 대한 사랑만큼은 의심하지 않는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진섭이의 그림 색깔이 다양하게 달라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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