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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opal Jun 04. 2019

올 더 머니 그리고 기생충

숙주와 기생충, 그 끝없는 질문들

All the money in the world


에이리언: 커버넌트, 글레디에이터, 블레이드 러너 등의 명작 감독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이 만든 '올 더 머니'.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석유 재벌로 유명한 '장 폴 게티'의 손자 장 폴 게티 3세가 1973년 로마에서 납치를 당하면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실제로 손자는 굉장히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고, 특히나 어렸을 적 아버지(장 폴 게티의 아들)를 따라 모로코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다. 마약, 알코올 등에 중독된 아버지는 그를 제대로 케어해주지 못하고 장 폴 게티 3세도 로마의 한 매음굴에서 방황하다 납치를 당하게 된다. 

납치범들은 당시 180억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을 요구하게 되고, 좌절한 장 폴 게티 3세의 엄마는 시아버지인 장 폴 게티에게 도움을 청한다. 


과연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 나에겐 이 점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장 폴 게티는 돈을 주지 않으며, 심지어 나중에 질질 끌다 소득공제가 가능한 범위 내의 금액만 며느리에게 주게 된다. 

이렇게만 들으면 장 폴 게티는 피도 눈물도 없는, 가족보다는 돈을 더 사랑하는 늙은 노인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내가 진짜 궁금한 건 왜 장 폴 게티가 그렇게나 돈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부분이다. 

실제로 장 폴 게티가 어떠한 인간인지는 모르겠다만 최소한 영화에서 비치는 장 폴 게티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많은 무시를 당하며 자라온 것 같다. 그 무시가 지금의 장 폴 게티에게 무섭도록 집착적인 원동력을 불어넣어 준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굉장히 자부심이 넘치고 자신감이 넘치며 세계 최고의 부를 가진 남자라는 타이틀에 많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보며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원인점을 찾고 싶어 졌다. 


이번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칸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그 연출력과 시나리오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아직 한창 상영 중이므로 스포는 삼가겠다. 


내가 기생충을 보고 난 후 올 더 머니와 엮어 굳이 생각을 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이다. 

두 번째로는 돈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모든 관계들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지금 세상을 전부 아우르고 있는 중요한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기생충이 이러한 핵심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어 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생충의 직접적인 스포는 피하기로 했으니 두 영화의 상관관계를 올 더 머니라는 영화 중심으로 풀어보자면, 

올 더 머니에서 장 폴 게티는 스스로 부와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본인이 일궈낸 가문의 명성을 이어나가길 바라고 있다. 이러한 명성 때문인지 가족과 주변인들 모두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하지만 그의 중심점은 그러한 관계들이 아니다. 그의 중심점은 그 자신이며, 가문의 명성이다. 

그러다 주변에 모인 이 중 핵심 '기생충'이 새끼 기생충들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숙주의 몸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그리고 그 숙주는 아무런 힘도 없이 죽어버리고 만다. 

(올 더 머니에서는 주변의 기생충들이 굉장히 멋있는 직업을 가진 이들로 나와 사실 기생충이라고 이야기하기 힘들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장 폴 게티 입장에서는 아마 똑같은 기생충이었을 테다) 


물론 영화 기생충과 올 더 머니의 차이점을 뽑으라면 너무나도 많지만, 나는 이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의 관점에서 본다고 하면 사실 두 영화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기생충이 기생충이 되기를 자처하여 숙주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양분을 쪽쪽 빨아먹는다. 때로는 그 숙주 품 안에 있으며 아늑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기생충은 그 숙주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 숙주보다 몸집이 더 커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숙주 품 안에 계속 있다 보니 그 숙주가 가는 곳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반감이 들다가 결국 그 숙주를 죽여버리거나, 숙주로부터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죽이게 된다. 


출처: 하입비스트 


어찌 보면 숙주는 전혀 잘못이 없다. 숙주는 원래부터 그렇게 살아왔고, 자신에게 달라붙는 온갖 종류의 기생충을 쳐내고 혹은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굉장히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생충 입장에서는 다르다. 기생충에게 좋은 숙주는, 거의 신과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숙주를 존경하기도 하며 동시에 쉽게 증오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모습만 단편적으로 똑 떼어놓고 보면, 숙주는 굉장히 철부지에 어리광만 부릴 줄 아는 아이 같기도 하다. 


다소 클리셰 한 이야기긴 하지만 기생충은 나중에 스스로 숙주가 될 줄 알아야 한다. 영화 올 더 머니의 경우 며느리는 곧 본인이 숙주가 되어 또 다른 기생충을 받아들일 준비를 아주 능숙하게 한다. 

숙주의 가문과 연결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의 역할을 뼈저리게 하며 느꼈던 그녀의 감정이 궁금하기도 하다. 그녀와 같은 캐릭터가 기생충에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역할이 어찌 보면 기생충의 파출부 아주머니였을까? 기생충의 시나리오대로라면, 결국 올 더 머니의 며느리도 숙주 인척,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기생충일까. 


올 더 머니에서의 장 폴 게티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부에 굉장한 집착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기생충들에게는 털 끝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는다. 사실상 기생충이 곁에 있어도 그것이 기생충인지 아닌지 관심 조차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 기생충에서의 기생충은, 본인들 스스로 기생충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자처하고 있다. 숙주는 심지어 그들을 기생충이라고 직접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올 더 머니는 숙주 중심, 기생충은 기생충 중심의 영화가 아닐까 한다.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결국 기생충이 빠져나가자 그것으로 인해 힘을 잃거나 이내 죽어버리고 마는 숙주. 


결국 기생충이 존재하기 때문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숙주에게 기생충이 달라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도 공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기생충이 붙은 이후, 기생충은 당연하게도 숙주가 있어야 살아가지만 숙주는 기생충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까? 한번 기생충이 들어오고 나면 결국 알게 모르게 그 의존도가 더욱 커져 그들이 아니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까? 그렇다면 누가 더 치명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결국 기생충과 숙주는 모두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는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 안에 답은 없지만, 사회를 일구고 있는 수많은 기생충과 숙주들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쪽에 속해있는지 어떤 역할을 자처할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타고난 숙명이자, 선택의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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