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아서 병난 여자 Jun 05. 2020

01. 모유수유는 1년이지만 가슴은 평생 간다

   

  매일 아침 샤워를 할 때마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일이 괴롭다. 축 늘어진 가슴을 보면서 한숨을 내쉰다. 손으로 잡아보면 힘없이 물컹거린다. 내 가슴은 더 이상 섹시하지 않다. 아주 오래전, ‘모유수유의 장점’ 중에 누군가가 ‘가슴이 예뻐진다’고 써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도대체 누굴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 사람은?! 그 말을 믿었던 나를 원망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찾아가서 따지고 싶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냐고! 


  아무것도 모른 채 낳았던 첫 아이의 모유수유는 실패했다. 그렇다. 모든 것을 성공과 실패로 가르는 우리 사회는 모유수유마저 성공과 실패로 나눴고 나는 엄연히 실패자였다. 두 달 만에 모유수유를 포기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나 모른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아기에게 모유조차 먹이지 못하는 엄마라는 죄책감이 더욱 나를 울게 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혼자 죄인이 되었다. 꿀떡꿀떡 맛있게 분유를 먹는 아이를 볼 때도, 모유수유하는 다른 엄마들을 볼 때도, 시어머니 앞에서도 나는 ‘모성도 없는 엄마’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두 아이의 모유수유는 성공이었다. 두 아이 모두 1년 6개월 정도 모유를 먹이는 동안은 우선은 몸도 마음도 편했다. 하지만 그 세월이 지난 다음, 지금 나에게 남은 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가슴이다. 바람 빠진 풍선을 아는가. 바람이 잔뜩 들어갔다가 빠진 풍선은 그냥 새 풍선과는 다르다. 크기는 더 커졌고, 힘없이 쭈글거린다. 딱 지금 내 가슴 같다. 그 옛날 할머니들이 아기를 뒤에 업고서도 젖을 먹일 수 있다고 하던 농담 같은 이야기가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자랑을 한다면, 미혼 시절의 나는, 가슴이 매력포인트였다. 어느 날인가는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려고 누워 있었는데 목욕관리사 이모님이 오더니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신다. 무슨 일인가 덩달아 놀랐는데, 이렇게 예쁜 가슴을 처음 봤단다. 그것까진 괜찮았다. 갑자기 다른 동료들에게 이리 와보라고 이 언니 가슴 좀 보라고 외쳤다. 덕분에 나는 발가벗은 채 진짜 말 그대로 구경거리가 되었지만, 내심 뿌듯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있을 때는 일종의 무용담처럼 ‘나 그런 사람이야!’ 자랑하기도 했다. 그 가슴을 나는 잃은 것이다. 


  모유수유를 하고 나면 가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그렇게 모유수유에 집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가슴이 뭔지 모르겠다며 그게 그렇게 모유수유보다 중요하냐고 묻는 미혼의. 아직 출산 전의 동생들이 있다면 나는 내 가슴을 보여주고, 만지게 해 주리라. 그렇게라도 그녀들의 가슴을 지켜주고 싶다.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그 사실을 나는 말해주고 싶다. 


  지나고 나면 참 별 거 아닌 일들이 있다. 나에겐 모유수유가 그랬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많이 울었던가 싶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혼자 죄인이 되었나 싶다.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만난 한 언니는 아기를 낳자마자 모유를 말리는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지금 낳은 아이가 셋째인데, 위로 두 아이 때 모유 양이 너무 많아서 정말 많이 힘들었단다. 그래서 아예 지금은 모유수유를 하지 않을 생각으로 처음부터 젖을 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언니가 너무 멋있고 부러웠다. 그런 한편, ‘저런 엄마도 있구나’ 내 안의 잣대를 들이대며 기막혀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양가감정을 갖고 나는 그때도 젖이 도는 8만 원짜리 마사지를 받겠다고 산후조리원을 나섰다. 


  모유수유의 장점이 많다고들 말한다. 초유를 안 먹이면 막 큰일 날 것처럼도 말한다. 아니다. 괜찮다. 모유 안 먹인다고 그 장점들을 못 채우는 거 아니다. 애착도 충분히 형성되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다. 아는가?! 나의 엄마 세대에는 분유가 좋다는 인식 때문에 돈이 없어 분유를 못 먹이는 엄마들은 모유를 먹이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어디를 바라보느냐는 내가 선택하는 일이다. 


  할로우의 ‘철사 엄마, 헝겊 엄마’ 실험에서도 알 수 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인간과 가장 비슷한 붉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새끼 원숭이들에게 대리 엄마를 만들어줬는데 하나는 철사로 만들어졌으나 우유가 가득 든 젖병이 달린 인형, 다른 하나는 푹신한 헝겊과 솜으로 만들어졌으나 젖꼭지는 없는 인형이었다. 새끼 원숭이는 실험진들의 예상을 깨고, 헝겊 엄마에게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철사 엄마에게서 배고픔을 채우고 나면 헝겊 엄마에게 매달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 실험은 아이들에게 애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즉 먹을 것만 먹여준다고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는데, 나는 이 실험이 모유의 역할 중 하나,  ‘애착형성’에도 반기를 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유 안 줘도 애착 형성,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모유를 먹은 아이들이 건강하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이래저래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의 경우만 따지자면 이 명제는 완전히 틀렸다. 분유를 먹은 우리 큰 딸에 비해, 두 아들은 훨씬 자주 아프다. 이비인후과적인 기저질환이 있어서 환절기나 겨울이면 감기와 비염을 달고 산다. 그럴 때도 우리 딸은 혼자 멀쩡하다. 결국 어떤 것들은 타고나는 것임을 경험으로 느끼면서, 모유가 아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맹신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아이의 건강을 이유로 망설여지는 분들이 있다면, [EBS 하나뿐인 지구_모유 잔혹사]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애착이니 건강이 아닌, 모유수유와 가슴의 상관관계다. 여자의 가슴. 아이에게 젖을 주기 위한 용도(?)이기에 ‘유방’이라고도 불리지만, 그것은 길어봤자 2년이다. 그 외에는 가슴은 그저 가슴으로 존재한다. 나는 그 가슴을 잃었고, 지금은 그래서 많이 우울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옷을 입을 때마다. 


  언젠가는 남편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여보 나는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못 펴. 다른 남자가 이 가슴을 만진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거든.” 

  갑작스러운 내 하소연에 남편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수술시켜 줄게” 

참 고마운 남자다. 


  모든 것은 선택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온전히 나 자신의 의지에 달리지 않은 경우는 참 많고도 많다. 그래서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실은 타의로 선택을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모유수유도 그렇다.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사회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는 떠밀리듯 모유수유를 선택한다. 


  세 아이를 낳고 기르며 모유수유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모유를 꼭 먹이지 않아도 된다고 힘주어 이야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역시나 ‘모성’이 얽혀있는 문제여서인지, 공개적으로는 아무 소리 못했던 게 사실이다. 가슴을 잃어버린 지금은,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후배 엄마들에게는 모유 먹이지 말라고, 안 먹여도 된다고, 괜찮다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해주고 싶다. 마흔은 그래도 되는 나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모유수유는 1년 가지만, 여자로서의 삶은 평생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00. 마흔은 그런 나이 아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