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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실장 Jun 01. 2021

이제 좀 살만해졌나..
(부산 노마스크 술판)

금주의 이슈 때리기.. (05월 24일~05월 30일)

지난 주말 아주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몇 년간 중국에서 근무를 했던, 아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언제든 '누구 하나 입 열면 다 죽는다'는 폭탄 발언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셋이 알고 지낸 지가 벌써 25년을 넘었다. 지난해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기 직전 설 연휴 때 가족동반으로 세 가족 12명이 함께 모였었으니, 15개월이 지난 지금은 그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많은 것이 변했음을 새삼 느낀다. 



토요일 저녁시간, 그래도 주변보다는 조금 시끌벅적한 먹자골목을 조금 벗어나 넓은 매장에 한 3팀 정도 식사를 하고 있는 한적한 보쌈집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친구들이 모두 그렇듯이, 교복을 입고 있을 때도, 넥타이를 매고 있을 때도, 학부모들이 되어 있을 때도,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철부지 남자들이다. 추억을 메인 안주 삼아, 사이드 안주로 사회, 가정, 육아 등의 얘기를 섞고, 트렌드에 맞게 주식, 코인 얘기로 입가심을 한다. 대화의 주제들은 매번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조금도 철이란 걸 들지 않은 남자들이란 것이다. 최소한 이 자리에서 만큼은.. 

철이 들지 않은 남자 셋은, 알딸딸한 취기를 안고 거리를 걷는다. 셋 중 한 명은 약간 비틀거리기도 했다. 비틀거림은 곧 10대의 추억과 혈기를 불러내 끝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든다. 다음날 기억도 남지 않을 시시껄렁한 이야기겠지만, 그 재미에 빠져 시간이 모자란다. 그 모자란 시간의 틈을 비집고 커피가 들어온다. 그렇게 30분을 더 떠들고 10시가 채 안된 시간에 각자 집으로 흩어진다. 


생각해보면, 기분 좋은 취기를 안고서도 QR 스캔을 하고, 주문을 하고, 마스크를 쓴 채로 커피가 입을 통과할 때만 마스크가 잠시 자리를 비켜주고는 다시 입을 가린다. 없었던 습관이 자리 잡은 지도 어느덧 1년여, 불편했던 습관이 패턴이 되어 자리잡음을 확인시켜주는 시점이었다. 취기는 사람을 본능으로 회귀함에도, 한동안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타듯 익숙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다만, 달라지기를 시작한 몇몇이 먹자골목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술이라는 힘을 빌려 용감(?)을 과시한다. 익숙한 마스크를 거추장스러운 물건으로 전락시키고, 담배를 피우고, 큰소리로 떠들고, 전쟁영웅인 양 당당하게 걷는다. 그 걸음이 설령 약간 비틀거린다 하여 '양해'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분 좋게 보낸 술자리의 끝에 집에 오는 길은 그리 흐뭇하지 않다. 






조금 살만해졌을까?

이제 조금씩 외출도 하고, 안주를 앞에 놓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아주 어색하지만은 않다. 비록 대충 먹었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다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님들이 일정한 테이블 간격을 두고 앉아있지만, 최소한 외식을 하려면 뭘 먹을지 고민할 수는 있게 되었다. 

노쇼 백신을 찾아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 어느덧 하늘의 별따기다 되었고, 미국에서 들어온다는 제법 많은 양의 백신 수급 관련 기사도 많이 보이고, 주식시장에서는 여행, 항공, 소비재 관련주들을 돌아봐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가득하다. 

조금 살만해졌을까?라는 질문에 '조금은~' 이란 답을 내려놓는데 주저함은 없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앞서는 건 왜일까.. 

나이에 숫자 4가 붙으면서 걱정이 많아져서인지, 아님 코로나로 인해 더 무거워짐을 느끼는 '가장'의 무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밋빛 전망 뒤에 색 바랜 그늘이 존재하는 것 같고, 그 그늘의 차가움이 점점 더 가깝게 살에 와닿는다. 이 느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늘 인생의 폭탄은 이대로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라고 생각하는 시점에 투하됐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묶여있던 밧줄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졌을 때 갖게 되는 희망이, 기대감이 아닌 '만족'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망상. 아직 손은 밧줄을 풀고 있음에도, 머릿속에선 이미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나태함이 올 수 있다. 이제 10%를 조금 넘었음에도 접종에 따른 혜택으로 마스크를 벗게 해달라고 얘기하는 것은, 나머지 90% 중에 또 다른 거짓으로 맨얼굴로 다니는 1%를 생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1%가 얼마나 큰 숫자가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예측하기 싫은 통계가 될 것이다. 


기우일 수 있다. 편향되어 가중된 오버일 수 있다. 

비즈니스가 안정화되고, 그동안 못 읽던 책을 좀 보며 뒤돌아보는 시간을 좀 갖자,라고 생각하며 시간이 바삐 움직임에도 잠시 쉬어가려고 했던 시점에 코로나란 폭탄을 맞았다. 

기우이던 오버이던 아직은 더 조심했으면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샴페인만큼은 마스크 벗고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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