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나를 찾다.
오늘은 관해장에서의 마지막 날.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관해장 주인과 이곳의 건축에 대해 그리고 이곳을 지켜나간 주인들의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분들도 초대 주인 못지않은 포부로 이곳을 지켜내고 계셨다. 인터뷰 말미에 시골버스 멘트를 부탁했다.
“이번 정류장은 여객터미널 역입니다.
저는 관해장을 운영하는 이형규입니다”
이곳을 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 정류장 이름을 불러줄 때 정류장이 살아났다. “우린 이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든 듯했다. ‘여관은 낡았어도 아직 있건만’ <목포 관해장 이야기> 시 구절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무언가를 추억할 수 있길 기도했다. 그것이 꼭 기쁘고 행복한 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관해장 사장님과 인사를 짧게 나눴다. 눈이 내렸고 우리는 목포역으로 향했다. 목포역으로 가는 골목골목이 익숙했다. “서울에서 보자” “빨리 올라와요~”땅에 내린 눈이 녹듯이 기차는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항구로 향했다. 눈 오는 항구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몸을 녹이러 카페에 들렀다. “왜 오늘은 혼자대요?” “저 싫다고 먼저 서울로 갔어요” 카페 사장님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커피를 마셨다. 눈이 제법 쌓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여기 나이 있으신 분들이 생일이 거의 비슷하대요 왠지 알아요?” 카페 사장님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배가 못 나가는 날이 비슷해서 애들 생일이 거의 비슷하대요” 잠시 생각해 보고 크게 웃었다. “배가 쉬면 할 일이 없응께~” 어렸을 때 자신들의 생일이 비슷한 걸 신기해할 아이들을 상상했다. “그걸 조금둥이라고 한데요잉”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혹시 주변에 조금둥이 아시는 분 있으세요?” “한 분 있는디..” 섭외 전화를 드렸지만 조금둥이 어르신은 선약이 있어 출생 비화는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나는 마지막 고하도 버스를 타기로 했다. “저는 오늘 신시가지로 넘어가요 다음에 또 목포에 오면 꼭 들를게요!” “그래요 다음에 오면 또 만나요” 첫날부터 신세를 많이 진 사장님과 반가운 이별을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다시 세상이 퍼렇게 물들었다. 눈이 어느새 그쳤다.
항구와 카페와 관해장을 스치고 버스는 고하도로 가는 목포대교로 향했다. “어디에서 내리세요?” 버스 기사님이 여쭤보셨다. “그냥 한 바퀴 돌 거예요” 버스에는 나와 기사님 둘만 있었다. 퍼런 세상에서 조금 더 어두워졌다. 심해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목포는 어떤 곳일까? 다시 나에게 물어본다면 “삶이 외롭고 힘드신가요? 그러면 목포의 항구로 가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기쁜 날은 그 자체로 행복하지만, 외로움에 허기진 날엔 나도 도무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그 시간이 흘러가도록 마음의 길을 내어줄 뿐이다. 많은 외로움과 슬픔을 외면했다면 목포에서는 그것들을 내 앞에 두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관해장에서 내려다본 목포의 바다 때문인지, 전성기가 지난 구시가지의 품 때문인지, 아니면 항구의 사람들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것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 말도 없이 등을 쓸어내리는 목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카페 사장님의 이야기에 툭. 고하도 사람들의 관심에 툭툭 내 마음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신기하게도 목포의 구시가지를 떠나 화려한 목포의 신시가지에 오자마자 더 외로워졌다.
우린 모두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달랠 때가 있다. 인생에 쓸쓸하고 외롭고 힘든 감정들은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감정들이 한데 모여 그게 내가 된다는 것을 여기서 알았다. 아직도 서툴고 어렵지만 이제는 이 감정을 조금 내려놓고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힘들지만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다시 관해장으로 가야 할 모양이다.
-Epilogue-
다시 목포에서 조금둥이가 녹음한
시골버스 안내방송을 기대해 본다.
“여기는 항동시장 역입니다. 저는 목포의 조금둥이 아무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