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3월
첫 미팅을 하고 나서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겨울 눈이 쌓인 담장은 백목련의 봄 옷으로 갈아입었다. 성질 급한 벚꽃이 띄엄띄엄 핀 모습에 '이걸 빨리 담아야 하나.. 아직 기획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봄 풍경이라니..' 하는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이 프로젝트를 수락하게 된 배경은 어르신 버전의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초가마을 어른들의 삶을 담아낸다면 좋은 컨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가까운 아이디어 발효를 하다 보니 '할머니&할아버지 리틀 포레스트' 컨셉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우선, 리틀 포레스트는 제철 먹거리의 에피소드가 주로 이어지는데 여기는 영화와 달리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에는 소재가 부족했다. 굳이 찾자면 조청과 연엽주라 불리는 전통주 정도... 이야기의 줄기로 먹거리를 담기에는 생명력이 짧아 보였다. 다시 이곳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제일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초가와 기와가 늘어진 전통가옥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바로 이것. 족히 500년 전부터 마을은, 개발과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지키고 유지해 온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첫 물음은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질까?>였다. 높게 솟은 빌딩 숲이 아닌 길게 늘어진 단층 초가집들을 매일 마주한다면 분명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낮은 담으로 계절도 오고 사람도 올 테니까. (그렇지만 너무 찬양하듯 이곳을 기대하진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자칫 감상에 빠질 수 있으니)
미세먼지가 뿌옇게 하늘을 가득 메운 봄 언저리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늘은 마을의 터줏대감이신 참판댁 어르신을 만나기로 했다. 이 어르신은 그 당시 서울 명문대 재학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으로 내려와 시묘살이(묘 옆 작은 여막을 짓고 3년을 지키며 돌보는 것)를 하신 분이다. 출세길을 돌려 고향길로 온다는 것이 그것도 3년을 묘 옆에서 산다는 것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 때에는 많이 하셨어. 근데 나 때에는 별로 한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예전에 그 프랑스 대사관이 와서 한 얘기가 바로 그거야 뭐 때문에 젊은 나이에 직장도 좋은데 있으면서 그거를 버리고 왜 거기 가서 허구 헌 날 그렇게 하고 있느냐? 그렇게 묻더라고. 그래서 대답을 하자면 나를 낳아준 부모니까 잘 놔줬던 못 놔줬든 간에 부모가 나를 낳아줘서 당신 같은 프랑스 대사관도 만나고 내가 비행기도 타보고 배도 타보고 기차도 타보고 다 이렇게 타고 글도 배우고..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 된 도리를 하다가 죽어야 그 대를 잇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더라고. 30년 같으면 못하지. 딱 3년이니까.. 효심은 두 번째고 아버지라는 그 마음의 정성. 아버지가 나를 3년 동안 어떻게 길렀나 그걸 알려면 3년 심혈을 해봐야 파리똥만큼 안다 그러시더라고"
어르신에게 시묘살이는 당연한 이야기였고, 이 당연한 이야기가 나에게는 꽤 어려운 이야기로 다가왔다. 지금의 효는 어떤 형태로 변해있을까? 경중을 따지긴 어렵겠지만, 왠지 어르신이 하신 효가 더 대단해 보이는 까닭은 '낳아주신 것에 대한 도리'에 대해 고민해 본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빠르면 그 물건이 오래가질 못해 차근차근해야 그 물건이 오래가도 보기 싫지 않고 좋게 보이지 빨리 한 물건은 한참 보면 정이 안 들어"
오래된 마을에 사는 어르신이 하신 이야기는 꽤나 울림이 있는 말들이 많았다. 분명 낮은 담장 초가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고 달리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또 며칠을 다녀올 생각이다. 신기한 것은 이 마을에 다녀올 때마다 고정관념의 껍데기를 벗기는 기분이다. 그것 만으로 나에게도 영향이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