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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민속마을] 전지적 관찰시점

2025년 4월

by Director JI

4월이 되자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이곳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큐는 무릇 발로 만드는 것인데 자주 찾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매일 등원과 하원을 신경 써야 하는 탓에 외박은 어려우니 아쉽지만 당일치기로 자주 다녀오자는 생각이었다.


서울에서 예상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몇 가지 가설을 가지고 3주간 방문을 하면서 기대와는 다른 모습에 이곳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도 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허무주의에 빠질 무렵 내가 너무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그럴싸한 것을 보려는 나의 렌즈 때문에 자세히 봐야 아름다운 것들을 정작 놓치고 있진 않았을까..? 첫 주에는 마을의 참판댁 어르신에게 몇 가지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를 수집했고, 이 이야기는 앞 뒤에 어떤 이야기를 덧붙여야 울림이 있는지 생각했다. 둘째 주에는 봄을 담는다고 마을을 돌다 냇가에서 돌미나리를 캐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무릎 수술을 하신 할머니는 주말에 마을 입구에서 채소를 파는데 가족도 먹고 용돈도 벌 요량으로 냇가에 나온다고 하셨다. "놀면 뭐해유. 안그래유?"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의 관절은 닳았지만 흐르는 시간도 지천에 놓인 먹거리도 아까우신 모양이다. 미나리 말고도 쑥을 캐시는데 그걸로 쑥개떡을 만들어서 파신다고 하신다. 입구에서 파는 떡이 이 마을에서 캐신 쑥과 이 마을에서 난 쌀로 만든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까 싶었다. 저렴한 금액의 떡이지만, 그걸 만드는 정성은 금액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떡을 만드시는 아침 풍경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배달음식이 넘쳐나는 도시의 모습에 이렇게 소박하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만드시는 모습은 흔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었다. 화려해 보이는 우리네 배달음식과 식당 음식들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할머니가 돌미나리와 쑥을 가득 담은 검은 비닐봉지를 대신 들고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 (얼굴도 틀 겸) 마을의 첫 집인 기와집이었다. 현관에는 집에서 만든 청국장을 판다는 글이 써붙여있었다. 아들을 먹일 생각으로 5개를 사서 집으로 왔다. 아내는 발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아들에게는 이걸 다 먹으면 튼튼해진다고 팔까지 걷어붙이고 알통을 보여줬다. 원산지도 믿음직했지만, 만든 사람도 알게 됐으니 부모로서 미안해하지 않을 한 끼를 선물했다.

KakaoTalk_Photo_2025-04-11-23-30-26 001.jpeg 원산지: 외암 냇가

다시 일주일이 지나 외암으로 향하는 길. 3주 연속 촬영감독님은 동행을 자처했다. 가는 길에 목이 쉬도록 영화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대화 중에 지금 하는 외암 프로젝트가 몸에 베인 광고 제작과 사뭇 달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투정을 부렸다. 사전에 완벽에 가깝게 준비를 하는 광고영상과 달리 외암의 다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촉을 곤두세우고 마을을 바라봐야 하는데 그게 또 마음이 앞서 천천히 음미하기가 어렵다. 이날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을 바라보자 이야기를 건넸다. 이 프로젝트를 의뢰한 대표님 내외분 그리고 이장님과 점심을 먹고, 이 프로젝트를 하고 싶으신 이유를 더 여쭤보았다. 마을에 전통을 잇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얼마 안 가 이곳에 안 계실 것 같은데 마을은 남겠지만 본질이 사라져 그게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장인 선생님을 마주하며 느꼈던 위태로운 왕좌가 이곳 민속 마을에도 존재했다. 맛있는 커피를 대접받고 이제는 익숙해진 돌담길을 걸었다. 벚꽃이 만개다. 낮은 담장과 초가지붕 위로 벚꽃 잎이 바람에 휘날렸다. 자연을 마당에 불러오고 문만 열면 수채화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괜찮은 스팟을 골라 인기척을 했다. 아무도 안 계셔서 다른 인서트들을 더 찍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곳을 찾아갔다. 할머니들의 대화소리가 들려 인사를 드리는데 참판댁 할머니도 계셨다. 이곳에서는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다음이 수월해진다. 마을 사람들이 보증인이 되는 셈이다. 할머니께 허락을 구하고 방안에 들어가 벚꽃을 담았다. 영화 중간중간 문을 열면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만 열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마당에 찾아온다. 선물이다.

KakaoTalk_Photo_2025-04-11-23-30-28 003.jpeg 드르륵 문을 열면 봄이다

할머니 한 분이 김치를 담갔다며 이곳 할머니에게 주셨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노을빛의 해가 할머니 세 분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이웃사촌. 아직 이곳에는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있었다. 한 할머니가 우리 집도 와서 찍으라고 하셨다. 교수댁 안주인이셨다. 다음부터는 여기 싸리문으로 그냥 아무 때나 들어와서 찍고 싶으면 찍으라 하신다.

KakaoTalk_Photo_2025-04-11-23-30-27 002.jpeg 파김치로 전하는 정

조금씩 아는 분들이 생겼다. 촬영을 마치고 올라가는 차에 마을을 보며 촬영감독님에게 이야기했다.


"이 마을 자주 오니 정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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