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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혜 Aug 12. 2023

개똥이네에서 보물찾기

아이 책보다 내 사리사욕 채우러 간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똥이네’를 알 것이다. 개똥이네는 아동 중고 전집 전문 사이트다. 아기 때 읽던 책을 팔 수 있고 원하는 책을 중고로 살 수도 있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니까 새로운 책이 계속 필요하다. 또 어릴 때 읽던 책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 중고로 처분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린이 책은 중고 거래 수요가 많은데, 중고 거래 대표 플랫폼이 이 ‘개똥이네’다.     


개똥이네 오프라인 매장도 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전국에 약 30곳 정도 된다. 아무래도 직접 책을 펼쳐 보고 고르는 것이 선택에 도움이 된다. 어떤 책이 있는지 직접 둘러보고 알 수도 있고, 중고품의 ‘사용감’이 얼마나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청주에도 개똥이네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 청주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아울렛과 백화점이 몰려 있는 지웰시티 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아이가 어릴 때 가장 가기 좋은 장소 중 하나가 백화점이다. 나는 육아휴직 당시 아이와 자주 백화점에 오면서, 근처에 위치한 개똥이네 오프라인 매장의 존재를 알게 됐다.  


청주 개똥이네 매장

청주 개똥이네에서는 ‘전집 대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정 금액을 내고, 1층에 판매를 위해 전시된 전집을 1년간 무제한 대여할 수 있다. 아이가 좀 더 커서 ‘학습만화’를 선호하면서부터 이 전집 대여 서비스를 잘 이용한다. 학습만화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유행을 빠르게 탄다. 그래서 원하는 걸 전부 턱턱 사주기는 아무래도 돈이 좀 아깝다. 도서관에 빌리러 가 보면 경쟁이 치열해서인지 남아 있는 책이 별로 없고, 그마저도 손을 너무 많이 타서 책장이 너덜너덜한 상태일 때가 많다. 그런 이유로, 나는 돈을 좀 내고서라도 상태가 좋은 책을 마음 놓고 빌려 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다. 개똥이네 연간 대여 회원권은 그런 나에게 딱인 서비스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에도 책이 꽂혀있다


청주 개똥이네는 2개 층으로 운영한다. 1층은 전집을 전시, 판매하고 2층에서는 중고 단행본을 판다. 그런데 이 단행본 코너가 무척 특이하다. 일단 가격이 무척 싸다. 한 권에 무조건 1000원이다. (앗, 중고책 한 권 과자 한 봉지보다 싸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책값이 싸지’했는데, 그 이유를 곧 알게 됐다. 중고책 분류가 오직 ‘아동용’과 ‘아동용이 아닌 것’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동용 서적은 한 10% 정도 되고, 나머지 90%는 그냥 일반 서적이다. 아마도 중고 매입을 한 뒤 문학/경제/외국어 등 분류를 전혀 하지 않고, 책장에 그저 차곡차곡 꽂아두기만 한 것 같았다. 분류에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책을 정돈하고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랜덤 구조’라면 애초에 무슨 책이 필요해서 찾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냥 둘러보면서 눈에 띄는 책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

     

단행본 한 권에 아묻따 천 원. 엄청난 가격! 하지만 그 가격인 이유가 다 있다.

개똥이네에서 아이 전집을 대여하러 방문하면, 아이는 1층에서 눈에 띄는 책을 가져다 읽는다. (책 읽는 자리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2층 단행본 서가를 찬찬히 둘러본다. 책 제목만 대충 훑으며 서가 전부를 둘러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예전에 유행했던 공부 관련 자기계발서(금나나의 ‘나나 너나 할 수 있다!’, 김현근의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 경제경영서(박경철의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가 군데군데 엄청 많이 꽂혀 있다. 한때 인기 있던 책들은 중고 매장으로 유입되는 양도 많은 모양이다. 개중에는 '사부님 사부님'이나 '유리가면' 같은 진짜 옛날 만화책도 있다. (여러 권짜리 시리즈인데 '4권' 딱 한 권만 있는 식) 또 한 때 유행했던 연예인 뷰티책('고현정의 결', '이혜영의 패션 바이블')도 있다. 모두 한때 베스트셀러였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 사람들이 찾지 않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대체 누가 언제 사 갈까 싶다. 일 년 넘게 지켜봤지만 늘 그 자리다. 그래서 이 개똥이네 2층 단행본 서가는 마치 ‘중고책들의 무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 번 꽂힌 책들은 새 주인을 찾기 전까지 여기를 떠날 수 없을 테니까.


그 외에도 다양한 책들이 무지무지 많다. 나는 간혹 쓸 만한 책을 발견할까 싶은 기대감에 매번 방문할 때마다 이 잡듯 서가를 훑는다. 무엇보다 ‘단돈 천 원’의 유혹이 엄청나다. 하지만 아무리 가격이 싸도 구입은 신중해야 한다. 천 원 주고 책을 사는 건 간단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길이 가는 책을 집어들고선 내가 이 책을 구입 '직후’ 읽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 책의 서문이라도 먼저 읽어 보면서 이 책에 대한 나의 선호가 충분한지 점검한다. 요즘 나는 독서 편향이 심하다.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서다. 특히 두꺼운 책이나 어려운 책은 손이 거의 가지 않는다. 한때는 지적 허영심과 의무감에 그런 책을 열심히 읽은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생활인이자 육아인으로서의 의무가 너무 무거워서 오로지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책에만 손이 간다. 그렇게라도 책 읽을 시간에 딴짓 안 하고 책을 읽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그래서 아무리 욕심이 나도, '사다 놓으면 언젠가는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닌' 책은 과감히 내려놓는다. 당장 읽지 않을 책까지 품기에는 우리 집 책장이 너무 비좁다.

개똥이네를 자주 방문한 결과, 비교적 "새 책"의 비율이 높은 서가를 알아냈다.

그러다 어떤 날은 망설임이 전혀 없을 만큼 좋은 책을 득템하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횡재한 기분이다. 개똥이네를 자주 방문하다 보니, 나는 맨 앞쪽 책장 가장 위 선반에 새로 매입한 책이 꽂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그러니까 발행일로부터 약 3~4년 정도밖에 안 지난 책)이 무더기로 그 자리에 꽂힌다. 이 또한 랜덤 배치일 터다. 담당자는 가장 눈에 띄고 책이 덜 꽂혀 있는 이 곳에 책을 갖다 뒀으리라. 그렇게 '비교적 새 책'이 몰려 있는 서가에서, 나는 하루에 무려 다섯 권을 득템했다. 그날 득템 목록은 아래와 같다.

     


1. 임경선-요조가 함께 쓴 교환일기 형식의 에세이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2. 너무나 유명한데 나는 아직도 안 읽어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 소설 <상실의 시대>


3. 카투니스트 ‘루나파크’로 더 유명한 홍인혜 작가의 독립생활 에세이 <혼자일 것 행복할 것>

      

4.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국 문학의 거장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5. 그리고 유튜브 영상으로 많은 영감을 내게 준 곽정은 작가의 에세이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  



이렇게 주옥같은 책 다섯 권이 단돈 오천 원! 오로지 개똥이네 단행본 코너에서만 가능한 가격이다. 중고책이 분류별로, 상태별로 등급이 매겨져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대형 중고서점 <알라딘>이나 <예스24>라면 절대 불가능한 가격일 터. 아마 이런 대형 서점에서라면 인기 있는 중고서적 한 권 가격은 오천원은 넘을 것이다.

    

이렇게 득템한 다섯 권은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이 만족스럽다. 순서대로 탐독할 예정이다. 특히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후루룩 진도가 나가는 중. 임경선 작가와 요조 작가가 이렇게 맛난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니.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한 기쁨이 크다. 나는 손에 잡힐 듯한 표현으로 삶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들이 좋다. 첫인상이 좋은 작가들은 두 번째 만남에서도 실망을 주는 법이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우연을 계기로 작가와의 다음 번 만남도 예정해 두었다.


내가 이 다섯 권을 득템한 그날, 아이는 <만화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30권 전집을 빌리고 싶다고 했다. 하드커버 올컬러 전집이라 30권이 든 박스가 엄청나게 무거웠다. 내가 전집 박스를 어깨에 둘러메고 혼자 끙끙대며 집으로 옮기는 동안, 아이가 내 책 다섯 권을 들어 줬다. 아이는 박스에서 하나씩 빌려온 책을 꺼내 읽어 나가며, 다 읽은 책은 박스 옆에 쌓아둔다. 박스가 빠른 속도로 비워져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슬슬 설레기 시작한다. 다음 전집을 빌리러 개똥이네에 갈 시기가 다가온다. 다음 번 방문에서 나는 또 어떤 보물을 찾게 될까. 한 권에 단돈 천 원, 하지만 득템의 기쁨은 무한대인 보물찾기다. (설마 개똥이네 사장님, 설마 이런 보물찾기의 기쁨을 주시려고 책을 일부러 랜덤 배치하실 걸까?)

     

그래서 나는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오늘도 아이에게 외친다.

“서윤아, 그리스 로마 신화 재미있지? 얼른 읽고 우리 또 개똥이네 가자? 재미있는 책 또 찾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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