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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관찰자 Oct 14. 2021

최소한의 인간 존엄

방금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한번도 없던 일이라 듣는 나마저도 아찔하다. 사실 이런 일을 이렇게 공개적인 글로 올리는 것이 옳은가 싶고 남편에게도 미안하지만 정말 이게 현실이기 때문에.


"나 갑자가 설사가 터졌어."

"응? 그래?"

"출근 시간이라 차는 막히느라 꼼짝도 안 하지... 죽는 줄 알았네."


남편은 3시간 30분짜리 장거리 노선을 다닌다. 화장실이 정말 급할 경우에 버스를 잠깐 세워놓고 이용할 수 있을만한 곳은 그 긴 노선에서 한두군데 있다. 하지만 출근 시간에 바쁜 승객들을 생각하니 화장실이 있는데도 차마 이용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차는 막히지, 식은땀은 나지... 그러다 지렸어."

"뭐??"

순간 말문이 막힌다. 그 지옥같은 시간 속에서 엉덩이에 힘주고, 클러치와 브레이크 밟느라 양쪽 발에 힘줬을 남편의 사투를 생각하니 내가 다 아찔하다.

"바지까지 다 젖었어."

"뭐??????"

"화장실에서 닦아내긴 했는데... 아, 어떡하지."


남편은 한숨과 함께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연발한다. 맙소사, 나도 멘붕이다.


"축축해서 앉을 수가 없어."

"지금 어디야? 차고지로 돌아온 거야?"

"응, 닦아내긴 했는데 냄새가 많이 나. 어떡하지."

아~~~  승객이 기사 옆까지 빽빽히 들어찰 시간은 지나 다행이지만, 나도 머릿속이 하얗다.


"다음 탕이 몇시 출발이야?"

9시 10분, 앞으로 30분 남았다.  

"내가 지금 옷 가지고 갈게. 30분 안에 갈 수 있겠지?"

"아니야, 지금 차 막혀서 그 안에 못 와."

"30분 안에 못 간다고?"

"그래, 못 와."

"그럼 어떡해?"

"지금 서서 마르는 거 기다리고는 있는데..."

"화장지 둘둘 말아서 의자에 깔아. 팬티랑 바지 사이에도 넣고. 엉덩이랑 팬티 사이에도 넣어. 아니다, 팬티를 아예 벗어. 어디 넣을 비닐봉지 같은 거 없어?"

남편은 한숨을 쉰다.

"이번은 어쩔 수 없고 도착할 시간 전에 연락해. 시간 맞춰서 옷 갖고 갈게."

"다 말라서 냄새 안 나는지 보지 뭐. 그때 봐서 연락할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만데 그걸 하루종일 입고 있겠다고?"


3시간 30분짜리 노선을 하루에 보통 4회 운행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5회 운행이다. 오늘이 바로 5회 운행하는 날인데 이제야 새벽 5시 29분에 출발한 첫탕을 마쳤을 뿐이다. 앞으로 4회가 고스란히 남았다. 집에 돌아오면 새벽 1시가 넘을텐데...


인간 신체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할 수 없는 근무 조건. 차고지에 돌아와서 쉴 때도 목이 마르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 없다. 그러면 금방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니까, 입 안에 조금씩 머금고 입술과 혀를 축이는 식으로 마신다. 생리현상이 급할 때 힘들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안쓰러워는 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배차 시간 맞추느라 밥도 못 먹고 바로 나가는 경우도 많지만, 이건 정말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고 당황스러운 일이다. 사실은 수치심이 드는 문제다. 최소한의 인간 존엄은 신체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 충족부터 시작되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느껴진다. 그런 최소한의 존엄마저 유지되지 못하는 것 같아 내가 다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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