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어 보여도 사실이다. 적어도 난 그렇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자유도 있다. 가정환경마다 경우가 다르겠지만, 미성년자 시절에 부모의 디렉팅이 많았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오롯이 내 선택'이란 걸 해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확률이 높다. 나의 경우에는 회사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으셨던 아빠보단 엄마의 디렉팅을 훨씬 많이 받고 살아왔다. 공부, 친구, 연애, 미래 등 내 인생 전반에 엄마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이 사라진 뒤, 앞서 말한 '오롯이 내가 선택'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지금의 커리어, 연애, 삶의 방식 등은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남자친구와 3년 째 동거중인데, 이는 엄마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어땠을까,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이랬겠구나, 상상이 가는 순간도 있다. 친구들을 만날 때다. 최근 몇 년간 내 주위엔 부쩍 엄마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우리 나이의 딸을 두신 어머님들이 갱년기에 접어드실 즈음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원래 엄마와 티격태격하던 친구들도,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도 엄마와 사이좋게 지내던 효녀 친구들도, 내게 똑같은 고충(을 빙자한 짜증)을 털어놓는다. "엄마랑 싸웠어."
이 얘길 듣고 '아... 나는 엄마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는데...' 따위의 애련한 감정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럼 '엄마 없는 나에게 이런 배부른 얘기를 하다니!' 하며 분노가 치밀었을까? 역시 아니다. 물론,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갱년기가 왔겠구나, 상상은 해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지, 비통한 감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저 나는 '엄마와의 갈등'이란 주제가 나와 무관하고, 앞으로도 겪을 일 없을 거란 자각만 있다. 세상 모든 고민들을 다 떠안은 내 머릿속이지만, 이런 고민만큼은 덜어내고 살겠구나 싶은 정도랄까.
오히려 내 앞에서 '엄마'라는 주제가 전혀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울 때가 많았다. 괜히 어색해하거나 내 눈치를 보는 상황이 더 불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어떤 배려를 하려고 했다기 보단, 내가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사실을 까먹었던 걸 수도 있다. 이야길 꺼내고 한참 뒤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안한 마음에 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 이야기를 이어간다. 근데 그렇게 하는 게 맞다. 미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 역시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종종 까먹기 때문이다. 그러니 친구들은 우정의 증표로 그들의 일상에서 가장 짜증 나는 것들을 내게 토로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게 연애든, 공부든, 일이든, 엄마든.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물론 '엄마의 부재'가 내 일상의 전부였던 때도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창 엄마 꿈을 꾸던 바로 그 때다. 이땐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들도 엄마의 부재를 도드라지게 하곤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장보기'였다.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엄마가 쓰시던 장바구니를 챙기는 일, 장 보러 가는 길에 서로 팔짱을 끼고 있는 엄마와 딸들을 보는 일, 장을 보고 포인트 적립을 할 때 엄마의 전화번호를 부르는 일 등 장을 보러 가는 길은 곳곳에 지뢰가 숨겨진 고속도로 같아서 순식간에 마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가곤 했다. 장보기라는 세상 일상적인 행위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양의 감정소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엄마가 없어서 잘 살지 못했던 때는 이 때로 끝이었다. 더 이상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 내 삶의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내 삶의 '디폴트 값'이 됐다. 엄마의 부재를 온전히 받아들인 상태가 된 것이다. 비로소 나는 울지 않고서도 엄마를 추억할 수 있고, 엄마와의 좋은 기억들을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으며, 엄마가 없는 삶을 비관하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주위 말 보단 내 멋대로 선택하고, 조금은 별나지만 자유로운 결정 하며, 원하는 정도로 엉망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난 자신 있게 엄마 없이 잘 산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