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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25. 2023

'아빠, 나 너무 행복해요'

Day 8 in Vancouver

열여덟 따님은 어릴 때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칭찬받는 걸 아주 좋아했다. 가끔 추억을 더듬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구글포토. 들여다보고 있으면 여섯 살, 아홉 살, 열한 살 때의 따님이 여전히 흔들흔들 거린다. 세 살 위인 오빠도 그 옆에서 열 살 정도의 무렵까지는 기계 체조(?) 같은 코믹 댄스를 잘 도 춰댔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 힘(!)으로 우리 동네에서의 새벽 맛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역시 아침, 아니 새벽에 일어나 앉아 이런저런 글을 읽고 쓰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남매들 어릴 때처럼 가끔 노트북 앞에서 혼자 흔들흔들하기도 하는 이유다. 


이렇게 앉아 찍어 둔 사진을 보다 보면 글감이 떠오른다. 거꾸로 글감이 떠올라 사진을 찾아 다시 보기도 한다. 앞뒤야 어떻건 다 좋다. 뭐, 물론. 폰을 가지고 그 장면을, 때로는 상황을 찍을 때 훅 하고 올라왔던 글의 포인트를 금세 잊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래도 다 좋다. 따님은 여기 와서 3년 만에 직접 만나는 오빠한테 일러바치듯 몇 번을 이야기한다. 어디를 가던 런웨이 준비를 하는, 유독 구름을 좋아하는, 셀카를 찍는 따님이. 오빠, 아빠 요즘 나보다도 사진 더 많이 찍어. 그냥, 다 찍어. 맞다. 다 찍는다. 그런데 틀렸다. 그냥 찍지는 않는다. 탁 하고 글감으로 연결하고 싶은 장면이다. 


다만,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갤러리 속에서 사진을 보고는 한참을 혼자, 새벽에 앉아 있곤 한다. 이거, 왜 찍었지, 하고. 그런데 사진을 찍어 놓는 건 심리적 안정감을 깊고 넓게 만들어 주는 데 참 좋은 방법이다. 그냥 풍부하게 행복해진다. 들여다보고만 있어도. 그러다 가끔은 실제 사진은 없는데 사진과 사진 사이에 비어 있는 장면이, 상황이, 멘트가 톡톡톡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래서 그게 글이 될 때가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갤러리 속 비어 있는 장면이 그렇다.


오늘은 화요일. 그저께 일요일. 남매를 태워 조카네가 알려 준 주소를 향해 달렸다. 폐차를 앞둔 오래된 밴이지만 고속도로에서는 꽤나 잘 달려 나갔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달린 곳, 고2 이후 처음으로 가보는 교회였다. 그것도 외국인들 있는 교회. 조카가 매주 다니는 교회다. 한국인들도 가끔 있단다. 그런데 국적은 다 캐나다란다. 우리, 엄마아버지, 어머님아버님. 모두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집안들이다. 아니, 어찌 보면 종교적으로 밀어내는 집안 분위기이기도 하다. 다만, 남동생 내외가 교회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 


교회는 아담했다. 막다른 길 옆 숲 속에 자리 잡은, 한적한 시골 농장 같았다. 서넛의 청년들이 한 개만 서 있는 농구대를 향해 공을 던졌다 주었다 하다 우리 밴이 주차장에 도착하지 동시에 쳐다본다. 여기는 앞유리, 운전석, 조수석 양옆 유리에 선팅을 하지 못해 훤히 다 들여다 보인다. 아드님이 그 청년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교회 청년부들이란다. 아드님은 작년부터 처형, 조카가 다니는 이 교회에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은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거의 모든 커뮤니티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타운십이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역사에 기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드님은 모태 신앙이 무교다. 아니 불교에 가깝지 싶다.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랑 자주 갔던 곳이 사찰이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교회에 가도 되요가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말 설은 땅에 홀로 와서 일요일마다 방에서 나오질 않았으니 영어도, 사람도 다 더 낯설어진 상황인 듯했다. 어느 날 아내한테 톡이 왔단다. 어머니, 저 교회가도 돼요, 하고. 우리 부부는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종교인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부담은 없었다. 다만, 교회에서의 좋지 않은 개인적인 경험상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그렇게 아드님이 일요일마다 처형, 조카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 교회가 여기였다. 교회 이름도 커뮤니티 처치. 교회 건물은 죄다 나무였다. 마치 어릴 때 다녔던 마룻바닥 교실 건물처럼. 그래서 그랬나. 화려하지 않고, 차분해서 더 마음이 편안했다.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사이. 처형이 내가 아드님 아버지라고 소개를 하면서 여기저기서 구경(?)하듯 나를 향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오늘 설교를 하신다는 인도인 담임 목사와 그 사모님 - 이 사모님이 이십 대 때 인도로 여행을 갔다가 지금 남편을 만났단다 - , 지난 1년 동안 아드님의 생일, 졸업 등의 다양한 세리머니를 도맡아 파티를 열어 준 4남매의 즈마야네 부모님 - 즈마야네 부모님 역시 한국 출신. 하지만 두 분 다 어릴 적 호주로, 미국으로 이민을 와 4남매는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캐네디언들이다. 


보조개가 깊게 패이는 솔직한 미소에 훤칠하게 잘생긴 즈마야가 아드님 친구다. 따님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못 본 척하는 게 쉽지 않았다. - ,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한국 부인과 결혼한 캐네디언 영어교사. 참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짧은, 거친 영어였지만 거의 눈빛으로 대화를 했다. 원데이, 원웨이를 구분 못해 겪었던 아픔(?) - https://brunch.co.kr/@jidam/859 - 에 대한 기억 덕분에 알아 듣지 못하면 무조건 나즈막히 쏘리를 내뱉었다. 연신. 


그렇게 계속 쏘리, 쏘리, 쏘리 하면서 동방에서 온 신기하게 생긴 사람이 되어 여기저기 다니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는 사이 이제 친구도 아는 이도 많은 아드님은 자연스레 일주일을 안부를 묻고 답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였다. 아직도 아버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살짝 의식하는 것 같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려고 애썼다. 그러는 사이 열여덟 우리 따님은, 태어나서 처음 교회를, 외국인 교회를 온 따님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분홍빛이 점점 짙어져 붉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따님을 둘러싼 언니들과 나누는 대화는 멀리서도 참 차분하게 단아하게 예뻐 보였다. 


인도인 담임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동안 - 설교는 무려 60분이 넘었다 - 허리 때문에 앉아 있지 못하고 뒤에 서서 서성거리는 나에게 따님이 톡을 보냈다. 아빠, 흐 아 어떠케. 졸려, 마구 졸려. 흐어. ㅎㅎ하고 짧은 대답만 했다. 그런데, 잠만보가 글쎄 한 번도 졸지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설교에 고개까지 끄덕이고, 웃는 포인트에 같이 미소 지었단다. 긴 설교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예배 전 짧게 인사를 나눴던 이들이랑 티 타임을 가졌다. 그냥 예배당 앞에 스탠딩 한 상태로. 교회를 간다고 일찍 일어나 준비하느라 분명 잠이 부족했을 텐데. 그런데 교회에 있는 내내 따님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한 번도 아빠, 나 행복해하지는 않았지만 한 순간도 다운되거나 슬퍼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돌아와서 씻고서도, 침대옆에서 나에게 달라붙어서도 따님이 반복하면서도 했던 말. 모든 사람들이 자기 눈을 쳐다보면서 끝까지 못하는 영어에도 들어주었단다. 그리고 말이 다 끝나고 나서 따님이 한 말을 다시 확인하면서 미소 지어 줬단다. 너, 지금 하는 영어 잘해. 좋아. 우리 자주 만나. 그러면서 나는 영어를, 너는 한국어를 서로 가르쳐 줘.라고 했다는 간호사 지망생 언니하고도 인사를 했단다. 즈마야 오빠 누나, 쉐리나 언니도 참 좋단다. 서툰 데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 고맙단다. 그래서 영어로 해도 괜찮다고 그러면 신나게 영어로 하는, 돌변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단다. 귓가에 뜨거운 입바람을 훅훅 불어내면서 이야기해주는 따님의 온기가 참 행복하다.


어제는 그 쉐리나하고 톡을 하더니 약속을 잡았다며 카드를 달랜다. 이번주 일요일. 예배 끝나고 청년부끼리만 바다로 수영을 간다고 수영복을 사야 한다며. 그렇게 보여주는 카톡을 보니 스물셋 쉐리나가 알바 끝내고 퇴근하면서 우리 숙소 앞으로 픽업을 온단다. 그리고는 조카, 쉐리나, 따님 셋이서 한참을 다니면서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고 왔다. 사가지고 온 수영복을 입고 거실로 나와 보여준다. 최대한 한국스러운(?) 수영복이었다. 쉐리나는 몸매가 예뻐서 비키니가 좋아, 하면서 추천을 했다지만 남 눈치 보는 게 습관이 된 한국인 따님은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는 수영복을 찾느라 시간이 더 걸렸단다. 


빙 둘러 서서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 서클 안에는 비교도 교만도 우쭐함도 없었단다. 말을 못 알아듣지만 전혀 답답하지 않았단다. 오히려 마음이 너무 편안하고, 설레고, 신기하고, 벅차고, 행복했단다. 그래서 행복하단다. 불을 끄고 누웠는데 천장에 온통 따님이 좋아하는 구름과 별이 잔뜩이다. 고2라는 어정쩡한, 그것도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시점에 옮겨 온 아드님은 그래서 더 과묵해졌을 것 같다, 는 생각이 교회에서 더 크게 솟구쳐 올라와 더 짠해진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만 컸을지 다 상상하지 못하겠다. 큰 일교차 덕에 냉기 가득한 침실이지만 가슴만큼은 따듯해지는 걸 느낀다. 남매들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나의 행복감을 텍스트로 옮기면 옅어지기만 할 것 같다. 내가 이런데 따님은 어떨까 싶다. 지금도 꿈속에서 쉐리나, 즈마야와 손을 잡고 행복한 구름 위를 사뿐사뿐 같이 뛰어다니는지 방문 열린 안방 침대에서 곯아 떨어져서도 잠꼬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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