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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22. 2023

황토방의 추억

옆 단지 공터가 황톳길 산책로가 되었네요. 스물 하나 아드님이 초등학생 때까지 같이 자주 야구를 하던 공터가. 그 덕에 꽤 늦은 시각. 아내가 먼저 같이 걸으러 나가자고 해서 너무 좋아요. 운동도, 특히 늦은 시간에 나가는 걸 좋아라 하지 않는데 먼저, 그것도 맨발로 걷자니 너무 행복할 수밖에요.


어머님과 여든이 넘으신 장인어른은 지금도 손을 잡고 걸어 다니세요. 그런데 그게 시작은 어머님이 먼저였다네요. 멋쩍어하는 장인어른을 끌어들인 게. 그러면서 우리 부부한테도 그래요. 너희들도 지금부터 손잡고 다녀야 우리처럼 나이 더 들어 자연스러워진다고.


이 대목에서 할 말이 많아요. 아내는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아내는 가만히 있어요. 그렇게 잡혀(!) 있어요. 손바닥에 땀이 자주 차서 그런다는 걸 결혼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요. 아, 오늘은 손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황토, 황토 이야기인데. 


태양에너지의 저장고라 불릴 정도로 동식물의 성장에 곡 필요한 원적외선을 다량 방사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도 불리는 흙. 음이온을 방출해서 산성화 된 체질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고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해 준다는 공기 중의 비타민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흙.  그게 황토예요. 


찜질방이 처음 생겼을 때 뻘겋게 원적외선 방출이라고 쓰여있던 표지판이 지금도 또렷하네요. 그 무렵이었을 거예요. 맨발로 아내의 뒤를 졸졸 따라 말캉거리는 물기 있는 부분만 찾아 걷다 보니 그 황토방이라는 키워드가 훅 하고 밀려 올라와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남매들은 태어나지 전이네요.


한겨레 신문사에 자그마한 광고가 하나 있는 걸 봤어요. 그때만 해도 창간된 지 10여 년이 조금 넘은 한겨레 신문사는 생각(?)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할 말 하는 신문사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그 대세에 나도 끼어 있다는 뭐 나름대로의 대리만족쯤의 의식 수준을 가지고 있던 나였던 것 같아요. 


여름휴가는 황토방에서. 평창 인근. 시원한 강변. 한겨레 신문 구독자면 무조건 1박에 1인당 2만 원. 


입금을 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그렇게 휴가에 맞춰 부모님을 모시고 평창으로 달렸어요. 아들, 남편이 되어서 서프라이즈는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지 싶어요. 휴대폰이 pcs라 네비로 길을 찾는 때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중간중간에 주인과 전화를 하면서. 그렇게 도착한 큰 강 옆. 


그런데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자갈밭이었어요. 한번 더 전화를 하니 전화기 속에서보다 강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면서 소리치는 게 더 크게 들였어요. 이리 들어오라고. 우리를 향해 계속 손짓을 하는 한분이. 마치 드루와, 드루와 하는 혼령처럼 지금 기억에 그리 남아 있네요.


그런데 들어오라는 그 길은 도로가 아니라 강변 옆 자갈길이었어요. 차가 다니나 싶을 정도로 도로 흔적이 거의 없는. 나지막한 SM 승용차에 넷이 타고 조심조심 한참을 들어갔어요. 쓰윽, 끽거리면서 차 바닥이 자갈을 문지르는 소리가 가슴에 닿을 정도로 크게 들렸지요.


그렇게 그 황토집에 도착했나 싶었는데, 차에서 내린 우리 넷은 서로의 눈만 맞추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가장 당황한 내가 먼저 주인장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어요. 건물은 조립식 막사 같은. 들어가자마자 막 대학생들이 떼로 몰려와 이것저것 해 먹고 사라진 듯 기다란 철제 위에 컵라면 용기, 봉지, 과자 부스러기, 라면꼬다리 등이 널브러져 있었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코를 자극하는 훅하는 곰팡이 냄새가 폐까지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 뒤를 돌아보니 벌써 셋의 얼굴은 놀라 당황한 듯하면서도 입조심을 하는 그런 표정. 아버지의 표정은 허탈의 경지에. 해맑게 웃으면서 자연친화라며 혼자 신나 웃는 주인장을 따라 식당 같은 곳과 연결된 뒷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갔어요.


앞뒤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어둑했어요. 아저씨를 따라 오르는 계단은 나무판으로 덧댄 듯 삐걱삐걱거렸어요. 그렇게 우리 넷이 순서대로 오른 황토방. 그곳에 잠깐 넷이 모이고서야 아버지의 어이쿠야 하는 신호음(?)과 함께 푸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어요. 


주인장이 사랑스럽게 매만지며 황토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벽은 황토색깔 벽지였어요. 그나마 벽면에 뭘 발라서 세웠는지 볼록 오목이 반복되는 기이한 구조의 방. 바닥 장판도 황토 색깔에 충실하느라 신경 쓴 게 영력이 보였어요. 군데군데 눌어붙어 있는 검은 갈색까지. 


그래도 엄마는 아이고야, 황토방은 황토방이네 하면서 농을 던졌지만, 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를 주체하느라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지요. 비위가 약한 아내는 벌써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아무 말도 없이 아버지는 아내 손을 잡아주면서 얼른 내려가고 싶어 하는 뒷모습이었네요. 


그렇게 다시 차에 탔고, 우리는 그냥 그 집을 나왔어요. 그리고 여기저기 들려 빈 펜션을 찾아다녔지요. 충격적인 황토방 덕에 생각지도 않던 럭셔리한 큰 방에서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는 왔지만, 그게 벌써 이십여 년이 넘게 지나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면서 혼자 풉하게 만드네요. 


낮에 아내와 한참 톡을 나눴어요. 업무중에 시간을 쪼개 급하게 나누는 톡은 둘 중 하나예요. 부모님 아니면 돈 이야기. 오늘은 돈이었네요.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도 앞으로 최소 3년 동안 남매들한테 지원해야 할 목돈이 꽤나 많아 그걸 만들 궁리에 머리가 다 아파, 온다였네요. 방법을 한번 찾아 보자, 라고 다독였지만. 


월급쟁이가 뭐 뾰족한 방법이란 게 도드라지게 있을리 없지요. 하지만 허리 통증을 달고 살면서 조금 더 알아가는 것 같아요. 마음이 아프면 운동을 해야 하고, 몸이 아프면 마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지금껏 반대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 모습을 스무해 넘게 옆에서 같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아내도 엄마 수술 이후에 스스로 더 느끼는 것 같아요. 지난 일요일에 난생 처음으로 내시경을 하고, 내일 모레 이런 저런 검사를 먼저 예약하는 걸 보면 말이예요. 왜 그래하는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아내에게 보조개 깊은 미소만 던지고 악몽을 소환시키지는 않았답니다. 


둘이서 앞뒤로 맨발로 보들 말캉거리는 황토흙을 밟는 날도 이 여름이 다 지나가면 며칠 남지 않겠다 싶어요. 오늘도, 내일도 그래서 나가야겠다네요. 비가 와도. 그래야겠어요. 비가 와서.  



----------(한줄 요약)

마음이 아프면 몸을 움직이고, 몸이 아프면 마음을 읽어 보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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