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Nov 17. 2023

골목은 이미 알려주고 있었어요

[오늘도 나이쓰] 1

스물 하나, 열여덟 우리 집 남매들은 유독 오랫동안 책상 아래, 식탁밑에서 놀았어요. 초등 저학년 때까지도. 책상다리, 식탁 다리, 의자 다리 사이사이를 머플러로, 목욕 타월로, 내일 입고 출근하려 다려 놓은 와이셔츠로 묶어요. 그리고 그 앞으로 온 방 베개, 쿠션을 꺼내와 세워서 벽을 만들어요. 그리고는 둘이 그 안에 들어가 빼꼼하게 내다봐요. 


아빠, 나 어딨 게? 

쉿, 오빠 조용히 해. 다 들켜...


식탁도, 의자도, 거실도 없었던 남매 때의 나는 냉기 가득한 다락방에 숨어들었어요. 삐거덕 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가 신호였지요. 엄마, 나 올라갈게, 하는. 그렇게 혼자 독차지한 기울어진 지붕 아래 다락방은 으스스한 천국이었어요. 조금은 꿀럭거리는 바닥이었지만 냉기들이 솜이불속 나만의 본부 속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이, 정말 따듯했어요. 그곳이 지금껏 가장 멋진 나만의 밀실이었네요.


엄마, 나 다녀올게. 

아빠, 잘 다녀왔어


이제는 그 다락방도 사라졌고, 아드님도 멀리 가 혼자의 또 다른 밀실을 만들어 잘 살고 있나 봐요. 아침, 저녁으로 우리 부부보다 더 바쁜 열여덟 따님도 책상 아래 식탁 밑으로 다시 들어가기에는 너무 커버렸네요. 지금은 그 자리를 일곱 살 윤타닥이 남매처럼 빼꼼하게 반짝이던 새까만 눈동자로 항상 올려다보고 있어요. 그러다 갈까, 하면 쏜살같이 중문 앞에서 얌전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나를 쳐다봐요. 그 눈동자를 해 가지고. 


그렇게 모두 이제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벗어나 뚜벅뚜벅 각자의 길을 걸어 나가네요. 조금 더 지나면 자기만의 골목도 광장도 가지게 되겠지요. 걷다 보니 가만히 그런 생각이 떠 올라요. 참 골목이 고맙구나, 하고. 골목은 안전벨트 같아요. 밀실에서 바로 광장으로 내몰리지 않는, 여유로운 공간 말이에요. 아무튼, 오늘도 나서야 하잖아요. 몸 가짐, 생각 정리, 마음 다짐 여부나 정도와 상관없이요. 


그런데 골목이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골목은 꼬불거리고 조금은 길면 더 좋아요. 안전벨트가 하나, 둘 더 생기는 것 같거든요. 친구야~ 노~올~자아, 하고 천천히 느릿하게 여러 번 외칠 수 있던. 길고 깊고 밀실 다음으로 아늑했던 그런 골목골목이. 


나만의 밀실에서 골목으로 나오면 일단 흠흠, 하고 오늘을 준비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해요. 어디서? 골목에서요. 골목을 다 벗어나기 전에요. 그렇게 골목을 걷는 동안 그 다짐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고, 필요 없는 것을 골라내 덜어 낼 수 있어요. 긴장되지만, 함께 해야 하는, 질서가 넘치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진짜 사는 게 되는, 넓고 깊은 광장으로 나가기 전에. 그 안에 섞이기 전, 깊은 심호흡 한번 할 수 있는 안. 전. 벨. 트.


늦은 저녁, 다시 밀실로 들어오기 전에 골목 입구에서 흠흠, 하고 오늘을 마감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해요. 광장에서 묻은 삶의 무게들을 다시 톨톨 털어내고, 우리 가족을, 내 식구를 다시 만나서 들어주고, 손 잡아 주고, 안아줄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해야 해요. 그리고는 또 한 번 크게 외치는 거죠. 아무도 없어도, 내가 먼저여도. 가득 찬 공기가 듣고 있고, 꽃들이 듣고 있고, 윤타닥이가 듣고 있으니까요. 



다녀왔습니다. 

나 왔어. 

일찍 왔네. 



밀실 골목길 (골목길) 광장 골목길 (골목길) 밀실 골목길 (광장) 골목길 (골목길) 밀실 골목길 (광장) 골목길 (골목길) 광장 (골목길) 광장 (밀실).... 골목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몰라요. 나를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처럼, 내일도, 그다음 내일도, 또 그다음 내일도. 이 약속을 계속 지킬 수 있는 비법을 깨달을 거라는 걸. 


골목에서 안전벨트 잘 메고, 잘 푸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나만의 밀실로 들어와서는 광장을 전혀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광장 속에서는 밀실을 말끔하게 지워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 오늘도 우린 서로 잘 다녀오겠다는 약속을, 아주 잘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다시 만나면 꼭 아무 말 없이, 손 잡아주고, 그냥 한번 더 안아주면 된다는 것을. 골목은 이미 알려주고 있었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