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나이쓰 ] 3 _ 사진:unsplash
그런 사람이 사례 발표를, 그것도 '우수한' 사례를 발표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혼자 '30분'이나. 발표하기 전 저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준비한 자료를 보여줬습니다. 뭐 그렇게 세련되지(?) 않은 PPT 자료였습니다. 그 학교만의 상황을 잘 몰라 내용은 쏙쏙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외견상으로는. 몇 가지 문구 수정과 액션을 추가하면서 피드백을 했습니다.
0000이란 배울 수 있는 힘으로서 학생들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자 더 나아가 인권입니다.
어느 한 교육청 홈페이지에 내려져 있는 0000에 대한 정의입니다. 0000은 바로 '기초학력'. 국어, 수학 등 교과의 내용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필요한 읽기, 쓰기, 셈하기를 포함하는 기초적인 지식, 기능 등등 최소한의 성취기준을 의미합니다. 진단검사를 통해 일정 기준을 넘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상입니다. 진단검사 수준이 자기 학년보다 1~3년 전의 학습 요소 수준이라 거의 없습니다, 는 공무 수행과 관련한 오피셜 기준입니다.
실제 대상자가 잘 없는 여러 이유중 하나는 선정되면 학생 맞춤형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몇 번의 향상도 검사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기초학력 대상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도체보다 더 민감한 아이들 사이에서 특정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별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학교 분위기상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과정을 온전히 교사의 강렬한 열정으로 꾸준히 메워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 업무를 해낸 겁니다. 그것도 '우수하게'. 그냥 남들 다 하는 걸 텐데, 이게 발표내용이 될까 하면서도. PPT상으로는 저도 거기에 살짝(?) 동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현란하지 않은 발표 자료 안에 묻어 있는 이야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자료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업무'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교육'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중학교 2학년 남학생과 점심때 자주 만났답니다. 처음에는 불러도 오지 않았답니다. 당연합니다. 내가 그 대상자라는 건 아이 본인도 게다가 보호자도 동의하지 않는 게, 비정상적인 집단 무의식입니다. 여하튼 안 오면 찾아갔답니다. 그렇게 운동장도 걷고, 복도에서 하이파이브도 하면서 그 아이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뒤부터는. 약속된 시간보다 더 먼저, 그 사람을 찾아오기 시작했답니다.
그 사람의 기초학력 업무 사례가 우수한 이유의 절반이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수의 아이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부족할 것 없는 (대부분의) 아이들입니다. 아니, 혹여나 보호자는 부족해도 아이들은 오히려 더 부족한 티가 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게 요즘 보호자들이니까요. 아, 이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하는구나, 그걸 느껴야 아이들은 움직입니다. 라포라고 하나요. 서로 통해야 하는 거지요.
그냥 '선생님 좋아요'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내가 이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겨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게 그 학생을 티 나지 않게, 학생이 티 없이 그 사람을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든, 그 과정이 대단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 큰(듯 이런저런 것들은 알아서 스스로 포기하는데 익숙해진) 고3 아이들 수백 명과 살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스스로 '찾아와야' 시작되는 겁니다. 가까워진 뒤 그 사람이 그 아이에게 '고민'을 물어봤나 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울컥 이 아니라 욱했습니다. 덩치가 산 만한 중학교 2학년, 이 정부 나이로 열네 살인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길래, 주변에 어떤 어른들이 보호자로 있길래 그렇게 서로 무관심했나 하고요. T 나게 반응을 했나 봅니다. 슬쩍 나를 돌아다보는 그 사람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편의점에서 계산이 잘 안돼요.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기를 당할까 봐 걱정이 돼요. 선생님, 저 사기당하고 싶지 않아요.
이 말을 아이가 직접 말을 꺼냈다는 게 기초학력을 이미 절반, 아니 80% 이상 확보한 겁니다. 휴대폰에 빠져, 운동에 빠져, 사람에게 빠져 있는 척 회피 기제가 발동하는 게 어쩌면 더 인간적인 거니까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시작한 기초학력 특별 프로그램은 별다른 게 아닙니다. 일괄적인 수업이 아닌 소수를 대상으로 하는 과외인 겁니다. 그 사람이 같이 근무하고 있는 국어, 수학 교사를 섭외하고 일정을 기획해서 운영하는 겁니다. 담당 과목이 다르니 직접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그 사람은 점심때마다 찾아오는 아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물어봐 주고, 달달한 것들을 주면서 토닥여 준 겁니다. 쌓여있는 다른 업무사이에서도. 한참 진행된 기초학력 향상 프로그램 일정이 모두 끝난 뒤에도 그 아이는 가끔 그 사람을 그렇게 찾아왔답니다. 당연하지요. 나를 살려준 한 사람, 그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하는 믿음이 산만한 덩치 속에 파묻혀 오랫동안 기죽어 있던 열넷의 마음을 따듯하게 보듬어 밖으로 끄집어 내주었을 테니까요.
사례 발표를 하기 얼마 전, 그 아이가 점심시간에 또 찾아왔답니다. 손에 초콜릿 막대과자를 하나 들고. 그 사람에게 그 과자를 건네면서 그랬답니다.
선생님, 제가 편의점에서 샀어요. 이거, 천. 팔. 백. 원. 이. 에. 요.
처음 욱했던 마음에 이 말에 그만 저도 울컥해졌습니다. 그 사람이 꾸린 팀은 열네 살 한 아이의 인간 된 권리를 찾아준 거였습니다. 그 권리로 사람에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나를 믿어 준 단 한 사람이란 존재의 소중함을 알려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사람을 믿게 만들어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루라도 더 나이쓰한 날을 만들 수 있는 원천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이쓰 하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꼬깃꼬깃 그 마음속에 깊숙이 넣어 주었을 겁니다. 참 나이쓰한 팀입니다. 교육자들입니다. 진짜 나이쓰 한 사람들입니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