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an 23. 2024

소중한 만남의 광장

[오늘도 나이쓰]15

며칠 전 새벽. 곯아떨어져 있어야 할 시각에 열여덟 따님이 내 옆으로 와 엎드렸다. 배를 욺켜지고. 잠결에 나는 아가 때처럼 습관적으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으로 배를 천천히 문지르면서 물었다. 무슨 배야?


다음 날. 따님과 같이 병원을 찾았다. 19년 만에 가는 산부인과. 3 진료실. 000 선생님. 그 자리에 그 이름 그대로였다. 배가 부르고 자그마한 아가를 감싸 앉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많은 젊은 부부들 사이에 우리 셋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 순서가 되자 따님은 담당 간호사방으로 불렸다. 담당의를 만나기 전에 사전 면담 같은 것을 하는가 보다. 그 방으로 이름도 없던 아이가 쑤욱 빨려 들어가는 걸 뒤에서 보면서 마치 과거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였다.  


따님이 면담을 하는 동안 커다란 tv에서는 열여섯 살인 우리나라 선수가 쇼트트랙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하고 있었다. 마이크에서 '김**님 처치실로 오세요'라는 멘트에 따라 움직이는 배가 불룩한 산모가 tv앞에서 일어나 내 앞을 지나쳤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단박에 이름과 눈매가 십몇 년 전 열아홉이던 우리 반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스크 위의 그 눈은 그때처럼 크게 웃고 있어서 더욱.


그러는 동안 아내, 아니 엄마의 몸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스물거렸다. 원래 이 병원이 의원이었는데 '여성'이 들어가게 명칭이 바뀌었네, 스물 하나 아드님을 받아 준 그 선생님도 여전히 계시네. 그 선생님 앞에 여의사한테 진료를 먼저 받았는데, 친절하지 않아서 담당의를 바꾼 게 그분이었는데 그 여의사는 없네.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과일 주스가 있었다는 것도, 그 가게가 사라졌다는 것도 아내는 기억하고 있었다. 스물 하나 아드님이 두 살 때. 뱃속에 있던 따님덕에 병원 갈 때마다 토마토 주스를 소리 내면서 바닥까지 쪽쪽 빨아먹던 소리까지 여전히 들린다면서.


한참 지나 나온 따님의 눈가가 불그스레 해져 있다. 나이 지긋한 간호사분이 이런저런 사항을 체크하면서 물었단다. 왜 남자 선생님이세요? 하고. 따님 또래의 청소년들은 당연히 여의사란다. 그래서 의아했는가 보다.


따님이 우리한테 찾아왔을 5주 차 무렵. 우리 부부는 임신한 줄 몰랐다. 몸이 좋지 않아 검진을 예약했던 아내. 검진 항목 중 내시경을 수면으로 진행한 뒤였다. 그 후 임신을 알게 되었던 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걱정에 어린 부부가 잠 못 들고 있을 때. 부모님과 가족회의를 하면서 어찌해야 할지를 걱정하고 있을 때, 그분을 만났다. 우리 부부만큼 젊고, 우리 부부보다 당찬, 우리보다 서너 살 위의 사십대 초반 남자 산부인과 전문의.


3 진료실. 000 전문의. 2-3주에 걸쳐 몇 가지 정밀 검사를 한 후에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그랬다. 지금 생각해도 이런 의사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다독이면서. '저만 믿고 그냥 한번 가보시죠'. 그 한마디가 이렇게 큰 힘이 될줄은 그때는 몰랐다.


나이 지긋한 간호사분이 따님한테 '옴마야, 그러셨구나'하고 반가워한 이유다. 어렴풋한 기억에 3 진료실은 많이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어린 부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그분 덕성에 우리처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겠다 싶다.


한참을 기다리다 응급 수술을 마치고 내려온 000 전문의가 우리 부부 앞을 지나갔다. 시선이 닿은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오랜 지인 만난듯 목례를 살짝 했다. 나와 아내도 그렇겠지만 그분도 꽤나 나이 들어 보였다. 걷는 모습이 구부정하기까지 해서 마음이 괜스레 울컥하기까지도.


더욱 아쉬운 건 아내와 따님을 따라 진료실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진료를 받고 나온 따님과 아내의 표정이 참 맑았다. 나오자마자 아내가 그런다. '선생님, 개그감은 여전하셔' 하고.


수면내시경으로 출산여부를 걱정하던 어린 부부를 기억하고 계셨단다. 그리고 백칠십이 다되어가는 이 아이가 그때 선생님 덕분에 태어난 그 아이라고 인사를 드렸단다. 그랬더니 '어 그래? 야, 그럼 너 공부 디게 잘하겠다, 맞지?'


따님이 뱃속에서 진통을 시작해서 기다리다 수술대에 올랐을 때 힘들어하는 아내한테 그러셨단다. '둘째죠? 에애, 금방 끝나요, 금방. 10분, 10분이면 돼요. 그런데 그 10분이 죽도록 아프다는 거죠!'하고. '셋째는 5분이면 돼요, 5분. 그런데 그 5분이 죽도록 아프다는 거죠'


어느 겨울날 아침. 출근하면서 일찍 등원시킨 따님. 어린이집 창문에 매달려 자기를 다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던 그 애절한 눈빛이 불현듯 떠올랐는지. 지금도 그 눈빛 때문에 내가 가끔 바보가 된다는 맞다, 분명.


아드님, 따님이 태어난 그 병원 가운데 홀 커다란 tv뒤쪽 창문 블라인드. 연핑크색 바탕 위에 새하얗게 쓰여있다. 마치 웨딩 촬영 배경 걸개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 많이 왔다 갔다 하던 그때는 눈이 들어오지 않았던, 아니 들어왔다 나갔을 그 문구가 지금은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래 난 진심 바보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이전 14화 쇠파리 덕에 소꼬리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