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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07. 2024

내가 먼저 나를 위로하는 법

[오늘도 나이쓰] 23

한파 주의보가 경보로 바뀌었던 어느 날. 새벽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각. 이런 핑계, 저런 꾀를 부리며 한참을 망설이다 오른 러닝 머신. 밤새 어둠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을 정면의 TV를 켰다. 먼저 오른 이가 마지막으로 들여다 본  채널에서 한 40세의 독일 여성이 (기억은 안 나는) 어떤 '슈퍼푸드'를 먹고 당뇨가 아주 좋아지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원을 산책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 오른쪽 아래 화면에 빨간색 바탕에 흰색 숫자로 그날 아침 기온이 지역별로 바뀌면서 표시되고 있었다. 원주 -15°, 강릉 -11°, 춘천 -15°, 광주 -6°, 대구 -9°, 부산 -7°,  제주 -0°, 서울 -14°, 전주 -9°, 청주 -12°, 울산 -8°, 의정부 -14°.



나는 5분 후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위해 삑, 삑, 삑 버튼을 세 번 눌렀다. 그러자마자 불현듯 내 머릿속으로 '술담커밀소설'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이 여섯 가지 모두 우리의 일상에 어쩌면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한 번쯤 '줄이자', '끊어야 하는데'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다. 무엇일까?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술, 담배, 커피, 밀가루, 소금, 설탕은 각각에 개인마다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는 다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거의) 완벽하게 줄이고, 끊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어쩌면 지역마다 '춥다'는 기준의 상대성과 같지 않을까 싶다.  



10대의 마지막 3년을 머물렀던 -11°의 강릉에 사는 사람들도  0°의 제주도 사람들도 똑같이 '춥다'라고 느낀다. -11°와 0° 사이에는 '추운 정도'가 11배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차이가 나는게 분명한 데 말이다. 어느 곳에 살고 있건 춥다고 '느끼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추운 정도도, 많고 적은 정도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적응할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 높다, 낮다, 많다, 적다와 같은 기준 자체가 몸이 '느끼는' 적응 정도의 결과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도 일정 기간 특정한 지역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거다. 그 환경에서 적응된 몸에 어울리는 정신 작용이 따라서 일어나게 될거다. 



'우리 동네'라고 부르는 특정 지역의 익숙한 타인들(헬스장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자주 마주치는 이들, 하천변을 뛰다 자주 스치는 그분, 등하교길에 자주 마주치는 그 아이,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나누는 그 사람)과도 알게 모르게 나의 작은(때로는 꽤나 큰)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TV속 그 독일 여성보다는 더 크게.



먼 '다른 동네'에 떨어져 살지만 단박에 나를 위해 달려와 줄 것 같은 친구와 지인들(20년 만에 다시 연락이 닿은 초등학교 동창, 길 가다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친 대학 동기, 지하철에서 나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나눈 한 살 어린 군대 선임, 나보다 기수가 아래인 고등학교 후배)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나와 동등한 또는 조금 낮은 대상이라고 내가 임의로 정한 기준들이다. 그들의 좋아진 혈색이, 인상이, 건강이 설탕, 밀가루, 커피, 술을 줄이고, 끊어서였다고 생각해 봐라.  게다가 그 결과 원하는 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획득했다면. 슈퍼푸드를 먹어 당뇨가 완치되었다는 독일 여성보다는 훨씬 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거다. 



동네 러너는 절대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여러번 우승을 한 선수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다른 학교의 전교 1등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나에게 가장 좋은 자극제는 항상 내 옆에(마음에) 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가장 나쁜 자극제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려고 한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누가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는 건 나를 돌아보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거대한 풍선일지도 모르겠다. 신선한 공기 대신 돈 들여, 시간 들여 헬륨을 채워 넣느라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된. 게다가 아주 자그마한 바늘(충격) 하나에 퓨슈슉 지나온 시간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항상 내재하고 있는 덩치만 큰 풍선. 



러닝머신 위에서 살짝 생각만 했는데도 소름이 올라온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그래서 오늘도 또다시, 다짐하게 된다. 오늘도 나이쓰를 외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속도도 양도 방향도 절댓값이 아닌 나만의 상대값 찾기. 그 값을 내 옆의 사랑하는 이들한테 (아무리 좋아도 내 방식만으로) 요구하지 않기.  



러닝 머신에 올라 어제의 나만 기억하고, 넘어서 보기. 마음에 들지 않는 내 글(거의 언제나 그렇지만)은 한 달 전, 일 년 전 나의 글을 다시 들춰 보고, 고쳐보기. 쫄지 말고, 막 쓰기. 내가 나에게 (음식도, 생각도, 말도) 몰아넣지 않기. 항상 무리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 묻기.



'이 정도'로 살기로 결정한 기준 시점, 기준량이 오로지 과거의 나에게서 찾으면 좋겠다. '이 정도'로 살기로 결정해야 그렇게 살아지는 거니까 말이다. 살아가는 게 정답은 없다지만 나한테 맞는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 그게 내가 사는 길일 테니까. 내 것이 아닌 기준에 정신적으로 두리번거리다 아까운 내 여정이 그냥 지나가지 않게. 



아침에 보인다고 다 해가 아니고, 저녁에 보인다고 언제나 달이 아니 듯. 내 삶의 기준은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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