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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10. 2024

#새벽마다 다시 태어나는 사람

[오늘도 나이쓰] 45

제가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을 익숙한 소리들이 이어주고 채워줍니다. 어제와 같이, 변함없이 다들 잘 살아내는 증거가 되는 소리들이. 어느 날부터 기다려지기 시작한 월요일 분리수거 차량의 집게 굉음, 어느 경비원의 경쾌한 빗질 소리, 어느 집 부지런한 이의 음식물 수거통 여닫는 소리, 짧고 명쾌한 새벽 첫 버스 방귀 소리. 


일찍 일어난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슬픈 청춘들의 악다구니소리, 일주일을 넉넉히 채우고도 남을 부드러운 바람소리, 느릿느릿 책장 넘기는 소리, 명랑하게 토닥거리는 무음 자판 소리, 반려견 타닥이의 발 구르는 소리, 사계절 내내 따듯한 보이차가 내 식도를 타고 조용히 위장으로 흘러드는 소리.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고 양배추두부면으로 이른 아침을 만들어 먹고 계란을 삶아 도시락을 싸고 설거지를 하고 어제의 쓰레기를 모아 들고 내려가 다 버려 버리고 짧아침 운동을 하고 사계절 내내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짧게 반려견 산책을 시키고 아내를 태우고 다시 오늘을 출근하는 매일.


새벽 덕분에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합니다. 저는 새벽에 일어납니다. 햇수로 세 번째 여름 새벽을 즐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출근 한 시간쯤 전인 6시부터 시작해서 차츰 5시, 4시 반. 그러다 작년 여름이 되기 전부터는 4시에 일어납니다. 가끔 눈이 가볍게 번쩍 띄어 시계를 보면 3시 반, 3시 일 때도 있습니다. 


새벽에만 들리는 소리들을 비트 삼아 동서고금의 현전직 선인들의 세계에 푹 빠져봅니다. 저의 현재가 과거에게 묻습니다. 다가올 시간에게 질문합니다. 내 안에 들어차는 문장과 밀려 나오는 문장 사이에 당연한 극심한 괴리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매일 쌓여가는 저의 기록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즐거우니까요.  


남매들은 저를 보고 갓생을 산다고 합니다. 그 의미가 어떻든 근면, 성실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한 성공 강박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거든요. 새벽 덕분에. 여태껏 살아오면서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그 자체를 즐기는 제가 되어 가는 게 처음이거든요. 오로지 새벽 덕분에 말이죠. 


저의 새벽에만 존재하는 소리들 사이사이에서 읽고 쓰고 하루 중 가장 멍하게 채울 수 있는 새벽 덕분입니다. 아주 나중에 뒤돌아 보면 저의 삶은 분명 오늘의 새벽을 즐긴 저와 그렇지 못했던 저로 나누어질 게 분명합니다. 새벽부터 시작하기 전과 후의 저로.    


충만하게, 기쁘게, 흡족하게, 깨끗하게, 즐겁게, 말끔하게 비우고 채우고 다시 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새벽에 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루 중 새벽은 공간과 시간이, 앞뒤 순서가 필요 없는 저의 놀이터입니다. 롤러장입니다. 댄스장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정상이고, 가장 깊은 심연입니다. 숨구멍입니다. 


매일 어김없이 찾아와 주는 저의 새벽은 시간과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짓지 않아도 되는 게 좋습니다. 느릿하게 편안해서 좋습니다. 일어나는 불안과 조바심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습니다. 슬쩍 누르고 밀어내는 저를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하루 한번 다시 태어날 수 있어 좋습니다. 


저의 새벽은 저에게 잘 맞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켜야 하는 수많은 세상일로부터 잠시라도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습니다. 살맛이 납니다. 지금 오직 저의 의지대로 저만의 새벽을 만끽할 수 있는 상황. 이게 가장 큰 행복이구나 싶습니다. 세상 모든 신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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