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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18. 2024

난감한 이야기

[노랫말싸미] 11

우리 가족이 지금 사는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온 건 십 년 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앞집의 주인들은 네 번 바뀌었더군요. 무심한 저는 오고 가는 때마다 인사를 나누기만 했던가 봅니다. 9월 말에 다시 이사를 가기로 확정했다는 모녀도 2년이 되질 않습니다.   


사실 앞집 아주머니는 저와 겸연쩍게 첫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작년 여름이었죠. 언제부터인가 출근하려는 데 방화문이 자주 열려 있더군요. 그래서 매번 닫고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또 열려있는 방화문을 닫으려는데 앞집 아주머니는 닫힌 줄 알고 열어두려고 나오다 저와 마주친 겁니다. 


우리 아파트 근처에서 아침식사가 되는 백반집을 운영하는 60대 아주머니는 그 후 우연히 아내를 만나면 먼저 이야기를 자주 건넸습니다. 여기저기 살피듯 소곤소곤 비밀스럽게 말이죠. 몇 번을 그러더니 아내가 저에게 우리 집인데도 귓속말을 하듯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앞집 윗집에는 세 남매와 엄마가 삽니다. 아내말로는 인근의 초, 중학교를 아이들이 같이 다니면서 왕래는 없지만 자주 보게 되는 가족들이었다네요. 우리 큰 아이와 그 집 둘째 딸은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었다고요. 워킹맘인 그 엄마는 우리 또래입니다. 


아내는 앞집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걱정이 생겼습니다. 십 년간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뀐 이유가 층간 소음이었다면서. 세 남매가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노래하고, 싸우고, 소리 지르고, 무언가를 끌고 다니고, 뛰어다녀 몇 번이나 위집, 아랫집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9월 말에 앞집이 빈다는 건 주인이 들어와 살거나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십 년간 세 번이나 주인이나 세입자가 바뀌는 동안 지금 집주인이 윗집의 층간 소음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본인들이 들어오지는 않을 테고, 새로운 사람한테 집을 팔거나 다시 전세를 준다는 이야기일 텐데...


여기까지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괜한 걱정이 같이 드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앞집에 다섯 번째 주인(세입인)이 될까 하고요. 그러면서 불쑥 기분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사진이라면 진작에 찢어서라도 없애버렸을 기억의 장면, 장면들이. 


신혼 때였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자그마한 돈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반가운 다세대 빌라. 교통도 편리하고 물도 잘 나오고 옥탑도 아니어서 참 좋았죠. 그런데 4월에 결혼을 하고 그해 6월 정도부터 악몽이 시작되었었네요. 


1층 평상에서는 거의 매일 밤마다 동네 사람들의 술판이 벌어지는 아지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아니 몸소 밤마다 체험하게 되면서부터 말입니다. 게다가 널찍한 4층에 혼자 살던 빌라 주인도 한 패거리였던 겁니다. 그러니 비가 꽤나 내리는 날에도 술판이 여전히 열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서로를 더 아껴주기도 부족한 신혼 때, 사는데 기대를 걸고 희망을 찾아 헤매었어야 할 삼십 대의 꽤나 여러 날을 미리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침묵으로 한 패거리가 되었던 모르는 이들을 원망하고, 돈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가던 시간으로 허비했던 아픔이 불쑥 올라오는 기억나서 말입니다.  


그런데 스무 해가 넘게 지나고 보니 신혼 때 살았던 그 빌라 주변의 한 패거리에 이제는 제가 속해 버린 게 아닌가 싶어 집니다. 누가 들어올지도, 어디서 어떤 모습을 살다가 올지도, 안다고 한 들 한쪽 이야기만 듣고 무언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말이죠. 무사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게 그저 꿈인데 말입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_<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장혜영) 노랫말 중 일부


9월말에는 제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지금 받고 있는 열기가 조금은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휑하게 식어버린 운동장처럼 되지 않고. 그 열기가 훈훈한 바람이 되어 이 사람, 저 사람의 가슴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기적에 가까운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조금은 덜 미안하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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