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당신이고 나이다.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인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뻔한 이유로 뭉근한 행복을 바라는 당신의 가슴이 나의 등을 밀어주고 나의 가슴이 당신 눈이 되어 주면서.]
'모든 목표 달성! 목표 달성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막 들어선 어둑한 거실. 워치에서 불꽃놀이가 인다. 까만 화면이 알록달록 해지는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기분이 좋다. 하루 끝에 이것만큼 스스로 기특해지는 게 없다. 미밴드에서 워치로 바꾸었을 때, 이걸 보고 싶어서 간혹 무리했던 좋은 기억도 떠오른다.
한참 동안 몸(체력)이 마음(면역력)보다 먼저인 줄 알고 살았다. 몸만 되면 마음은 따라올 거라 믿었다. 그렇게 믿는 동안 몸을 무기 삼아 이런저런 일을 늘어놨고 거절하지 않았다. 다 해내는 내가 위대하고, 잘 해내는 내가 우월하다고 스스로 최면 들게 했다. 최면에 깊게 빠질수록 내가 쏟아내는 부정적인 말(생각)들이 넘쳐났다.
한참 동안 가시덤불숲 속에서 헤매다 많은 상처를 받았다. 상처가 아무는 아픔에서 배운 것은 몸도 마음도 아니었다. 말이 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뱉지 않아도 피어오른 생각도 말이라는 것을 느꼈다. 순간마다 잃지 않는, 잊지 않는 희망적인 말, 예쁜 말이 나의 마음을 살린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 말이 마음이 되고 마음이 그렇게 되어야 몸이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말은 알랭드 보통(불안, 2017)이 말한 하나의 불안이 다른 불안으로,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으로 대체되는 인생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실마리(가능성)가 되는 것이었다. 그 말(생각) 속에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칭찬과 위로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스스로에게 매일 건네는 칭찬과 위로는 내가 정말 의미 있어하는 일, 제대로 원하는 영역을 찾고 먹고사는 일과 즐겁게 병행하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그 원동력이 있어야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라 허비하는 삶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시작은 결국, 말(생각)이었던 것이다.
대단한 프레젠테이션 보다, 예리한 보고서 보다, 출근길에 마주하는 익숙한 얼굴들과 목소리로 안부를 나누는 것. 낮동안 일과 나를 구분하는 것. 퇴근길에 거울 한번 보며 스스로에게 윙크 날리고, 엄지척이라도 한번 해주는 것. 모든 음식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그것들이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눈을 감고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인다. 눈을 감고 내 글 속에 떠다니는 말들을 다시 떠올린다. 눈을 감고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을 이제는 꼭 갖는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리기 전에.
그러면서 알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아무것'이 무가치,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거나' 다 해내려, 더 잘하려 하느라 밖으로는 비범한 척 보일수록안에서는 자아 분열이 물 먹듯이 일어나는 상태를 멈추자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을 내가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아가는 길. 내가 잘 몰랐던 나를 찾아 걷고 또 걷는 길. 그 길가에 피어 난 생명들, 마주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예쁜 말, 희망적인 말로 서로의 생에, 하루뿐인 오늘에 안녕의 찬사를 보내는 것. 그게 남은 인생의 가장 훌륭한 목표여야 할거다.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은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69-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