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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22. 2024

유일한 식탐

[다들 그렇게 살아요. 뻔한 이유로 행복하게] 17

['다 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당신이고 나이다.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인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뻔한 이유로 뭉근한 행복을 바라는 당신의 가슴이 나의 등을 밀어주고 나의 가슴이 당신 이 되어 주면서.]



아내는 내가 평소에 아무거나 잘 먹는다, 고 자주 말해 준다. 결혼 전 혼자 십 년 넘게 살면서 끼니마다 먹을 걸 결정했던 나로서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때마다 먹거리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맛있게 잘 먹으면 그저 고맙다. 싹싹 그릇을 비우면 마음에 쌓인 것들까지 몽땅 비워지는 것 같아 또 만들고 싶어 진다.


아내의 칭찬은 어머님이 먼저 하셨고, 지금도 가끔 그러신다. '윤서방은 정말 아무거나 잘 먹어서 좋아' 하시면서.  


그런 나에게 아내는, 내가 '유일한 식탐'을 가진 음식이라고 콕 집어 말하는 게 있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할 수 있나' 하면서. 나로 인해 아내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더 좋아진 음식이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 해. 나는 열일곱 살의 하숙생이었다. 두어 달에 한두 번.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고 하숙방에 가방만 던져둔 후 혼자 30분 여분을 걸었다.


시내를 가로질러 동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널따란 하천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 살짝 언덕 위에 있던 분식집을 가기 위해서다.


초록빛이 베이지색 줄기와 섞여 가늘게 썰어 산봉우리처럼 올려진 양배추. 그 아래에서 촉촉한 빨간 양념을 머금은 탱탱한 쫄면발은 언제나 생기 넘치게 꿈틀거렸다.



참기름 향이 솔솔 코를 간지럽히고 깨가 흩뿌려진 삶은 계란 반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한 올 한 올 새콤 매콤한 맛을 음미하면서 느릿하게 한 그릇 먹고 나오면 몸이 훅하고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가 자주 말하던 '든든'하게 먹어야 세상사는 힘이 난다는 것을 옆에 엄마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생각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열일곱의 나는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약간의 설렘에 옅었던 두려움이 진해지던 때였다. 그때 하숙집 형 덕분에 우연히 알게 된 게 바로 '쫄면'이었다. 


한 그릇 먹고 나온 세상은 온통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좋다고,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천천히 먹고 하숙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시간이 일주일 만의 소중한 산책이었고 휴식이었다. 


햇살을 쬐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내가 나에게 묻고 답하는 아프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 음식이 있다는 것은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 순간에 열렬했다는, 그때를 많이 즐겼었다는 증거일 거다. 


눈은 속여도 맛은 못 속이듯 세상은 속여도 내가 나를 속이지는 못한다는 의미일 거다. 


탐도 욕심이겠지만 그 욕심 속에는 내가 나로 좀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진한 양념처럼 속속들이 베이 있는 좋은 욕심일 거다. 


열일곱의 쫄면이 나에게 잘할 수 있다고, 쫄지 말라고 응원해 주었다면 지금 아내와 가끔 나눠 먹는 쫄면은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푹 쉬라고 토닥여 주는 듯 해 좋다. 


열일곱의 나는 삶은 계란을 제일 나중에 먹었지만, 함께 먹어 주는 아내 덕에, '윤쫄'이라고 외치는 따님 덕에 지금은 삶은 계란을 먼저 먹는 여유도 생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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