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당신이고 나이다.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인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뻔한 이유로 뭉근한 행복을 바라는 당신의 가슴이 나의 등을 밀어주고 나의 가슴이 당신 눈이 되어 주면서.]
새벽 독서를 끝낸 후 샤워를 할 때가 자주 고비다. 뜨끈한 수증기처럼 스멀스멀 꾀가 올라온다. 스스로 들여다봐도 가지가지 이유다. 좀 아파서, 좀 피곤해서, 좀 귀찮아서, 너무 (더)추워서. '그냥, 갑자기'도 무지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 일쑤다.
출근 전 (고작 30여분 하는 헬스장) 운동을 할까 말까 하는 거다. 이성적으로는 너무나 잘 안다. 내뱉는 말이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는 것을. 좋은 의미일수록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게 항상 문제다.
(나한테 미안해) 헬스장에 내려가면 또 꾀를 낸다. (그냥, 갑자기 컨디션이 좋지 않다, 고 나 혼자 생각이 들면) 근력 운동 때 중량도, 세트당 횟수도 줄인다. 내일의 내가 다시 하기 싫어하지 않을 만큼 과감하게.
중량을 줄이는 것을 절대 미안해하지 않는다. 어제는 100을 들었는데, 오늘은 (그냥, 갑자기)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70만 들어,라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거다. 나를 절대 타박하지 않는다. 내일의 내가 또 하고 싶어 하도록 너그럽게.
세트당 횟수를 잘게 쪼개는 건 더 간단하다. 10회를 한다면 하나, 둘, 셋..... 열로 카운트하지 않는다. 1,2,3,4, 1,2,3,4,1,2 식으로 두세 번에 나눠 쪼갠다.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운동할 때는 다섯 개를 세 번 쪼개서 카운트하기도 했다.
내가 나를 (스트레스 안 주면서) 속이는 거다. 속이지 않으면 다음날 영락없이 해야 할 이유가 할 수 없는 이유에 밀린다. 그런 날은 내게 밀린 나를 내가 감싸안는 나와 따끔하게 혼을 내려는 나 사이의 싸움에 휘말려 이유 없이 가라앉기 쉽다.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가 쓰라고 한 적 한 번도 없다. (나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잘 쓴다,못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 타박하는 이도 없다. 관심도 없다. 이거야 말로 정말, 그냥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어서 쓸 뿐이다.
그래서 더욱 산책처럼 운동이 필요하다. 글력 운동이.
글력 운동 하나.
가장 기본(?)이 되는 글력 운동은 무엇보다도 읽기다. 읽어야 나를 만난다. 나의 생각, 감정, 가치, 내 안의 나, 여러 세상들.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난다. 동시에 여러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들의 자궁이다. 책은 책에서 나온다'(51쪽)
<고요한 읽기>의 이승우 작가 말이다. 매일 쓰다가 일주일에 3회로 줄인 핑계다. 나는 태어났지만, 작가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냥 '읽는다'는 행위만으로 나의 글력이 만들어 질 리 없다. 읽는다는 행위는 작가의 의미가 나를 통과해 새로운 의미로 텍스트화되어야 한다.
글력 운동 둘.
읽은 책 속 작가의 텍스트가 내 삶에 어슴프레(한 일몰의 햇귀만큼이라도) 투영될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읽은 것이다. 나의 두 번째 글력 운동은 구글 렌즈로 바로 찍고, KEEP에 바로 옮겨 메모하는 것이다. 근력 운동 때 세트당 횟수를 잘게 쪼개듯이.
글을 잘게 쪼갠다는 의미는 앞뒤 안 가리고 떠오르는 데로, 보이는 대로, 산만하게 (바로) 메모를 해둔다는 것이다. 단어, 짧은 문장, 몇 음절, 사진, 음성, (허왕된 듯한) 계획들 까지도 모두.
이것들은 글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통과하면 언젠가는 글이 될 (예비) 글들이다. 소리 내어) 읽다가, 보다가, 듣다가, 움직이다가, 먹다가, 자려다가, 일어나다가, 말하다가, 쓰다가. 오늘 새벽까지 KEEP에 저장되어 있는 그것들은수백 개다.
글력 운동 셋.
KEEP속에 만큼은(내 수준의) 글감은넘쳐난다. 물론 왜 써놨지 하는 것도 많고, 두세 개가 연결되는 것들도 가끔 있고, 쓰다가 마는 것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KEEP을 들여다보고, 하나하나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재미난 글력 운동이다.
가끔, 흩어진 메모들이 내 안에서 뒤섞여 새로운 글(감)이 되기도 한다. 신비롭다. 물론 항상 문제는 (글쓰기라도) 그냥, 갑자기 귀찮아져서그럴 뿐이다. 당연하다. 쓰기에 대한 의무는 내가 부여한 거다.
쓰기가 싫은 날은 쓰지는 않지만 쓴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KEEP에 모여 있는 '문득, 글감', '책, 저자'를 다시 읽는다. 그러다 보면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솟는다.
글력 운동 넷.
나의 쓰는 행위가 어느 순간, 어떤 상태에서 시작되었나 가끔 되돌아본다. 초심에게 (나태해진) 이유를 따지는 거다. 어렴풋한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더듬어 보면, (나의 경우에는)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 (아무도 그러라 하지 않았을 때) 쓰기 시작한 거였다.
지금은 왜 쓰려 하는지 자주 물어보는 거다. 잘 (안)쓰고, 잘 (안) 읽히고, 좋아요가 (안) 넘쳐나고, 댓글 많이 (안) 달리고, 잘 (안) 팔리는데... 사이에서 진짜 나는, 내 마음은 어디쯤에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대답하라 요구한다.
혹시 문득, 불쑥 '왜 써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잠시라도 많아지면 쓰는 게 좋아서가 아니고, 쓰는 내가 좋아(져)서 인지는 아닌 것인지 자꾸, 자주, 집요하게 물어봐야 한다. 욕심은 (내)글보다 나를 먼저 망칠테니까.
<고요한 읽기>의 이승우 작가말처럼 신이라도 애쓰고 분투하는창작자의 꿈속으로 필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들어와 무언가를 끌어올려 만들어지는 것, 그게 '위대한' 작품일 테다. 영감보다는 평소에 자잘하게, 꾸준하게 해두어야 하는 글력 운동. 근력 운동만큼 중요한 이유다.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이라고 꼬집은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이다. 그는 프랑스 낭만파 시인 라마르틴의 예를 들어 이 문장의 뜻을 설명했다. 라마르틴은 어느 날 숲길을 거닐고 있을 때 한 편의 시가 완성된 형태로 섬광처럼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 시를 그대로 옮겨 적기만 했다고, 자기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재에서 수없이 고쳐 쓴 방대한 분량의 원고 뭉치가 발견되었다. 작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관념,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택,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신의 영감에 의해 위대한 작가와 작품이 탄생한다는 낭만적인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라고 해야 할 것이다.(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