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Feb 02. 2023

나의 해방 일지

그저께부터 공식적으로 마스크 착용의무가 해제되었다, 고 한다. 돌림병 때문에 온 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하 지 3년이 넘는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총 5주 동안의 자가격리를 해야만 했다. 4주는 출입국 때문이었고, 이번 설 연휴가 끝나면서는 재택치료 대상으로서. 올 설 연휴는 어느 해보다 마음이 바빴었다. 서먹해진 동생네와의 6개월 만에 만남도 있었다. 나와 아내의 마음에 그늘이 입에서 식도로 위로 장으로 음식 넘어가듯 그렇게 옅어지는 선순환의 시작이 되었다. 양가집 모두 제사를, 차례를 모두 없애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식구들이 한꺼번에 모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그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쪼개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네, 초중고 친구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학 동기들도 만나는, 나름 강행군의 일정을 기분 좋게 했다.


잦은 운전 때문에 은근히 허리를 걱정하고 있던 연휴 다음날 25일 오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가 열감이 있다고 했다. 38.3도. 감기구나 했다. 아내는 해열제를 얼른 하나 먹고 직장에 연락을 한 뒤 다시 잠을 청했다. 그 사이 나는 친구들과 연락을 취했다. 오늘 올 수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그때 그날 모임을 손꼽아 기다리던 A가 톡방에 글을 올렸다. '아직 백혈구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지, 면역력이 꽝이라 열이 나고 조금 힘드네. 오늘 친구들 보는 건 조금 더 연기해야 할 듯. 미안해, 친구들아'. 몇 해 전 암 수술을 하고 완치를 하고 올해 복직 예정인 아내와 나의 친구였다. 그 메시지를 보면서 아내가 좋아하는 매생이 굴죽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둘이서 조금씩 나눠서 점심 대신 하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B가 톡방에 긴급하게 메시지를 띄웠다.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증 증상이 나타나서, 나 지금 병원으로 이동 중. 얘들아, 오늘은 너희끼리 봐야 할 듯. 나중에 연락할 때'. 그리고 한동안 톡방은 B의 아버지 안부를 묻는 메시지로 가득했다.


약속은 오후 6시 반. 용산. 집에서는 그때부터였다. 나도 아내처럼 '어, 몸이 정상이 아닌데'하는 느낌을 받은 게. 그런데 우리 부부는 CC다. 일곱이 만나기로 했는데, A, B도 빠지고 우리 부부마저 빠지면 한 달 넘게 몇십 년 만에 보려는 친구들 모임 자체가 되지 않을까 싶어 톡에 메시지를 올리지 못했다. 물론 스무 해 넘게 살다 보니, 아내가 나보다 훨씬 면역력이 좋았기 때문에, 해열제 두 알에 아내의 체온이 정상이 된 게 큰 몫을 했다. 그렇게 친구들 - 결국, 우리 부부 포함 다섯이 모였다. 운전하고 가는 길에 대학 졸업 후에 결혼식 때 한번 보고 스무 해 넘게 못 봤던 C도 감기 몸살이 심해 못 오겠다는 톡이 올라왔다. 그래서 나와 친한 남자 동기들 D, E, F만 참석했다.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이 친구들은 면역력이 이순신급이라 나중에 연락을 했더니, 정상근무 이상무라고 답이 와서 덜 미안했고, 고마웠다 - 모임을 하고 열 시가 조금 넘어 집에 도착했다. 


26일 새벽. 침을 삼키다 목에 턱 걸리는 느낌, 아니 통증에 잠을 깼다. 원래 아침 9시 반에 치과 예약이 되어 있어서 나가는 김에 옆 건물에 늘 다니던 내과에 먼저 들렸다. 그리고 거기서 확진. 3년 만의 처음이었다. 병원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병원 입구 복도에서 나 홀로 기다리는 기분은 수많은 학생들을 지인들을 그렇게 조치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 상황이 되니, 영 기분이 뭐 날아갈 것까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내, 딸과 함께 언제 한번 그랬었다. '아휴, 다 같이 걸려서 일주일 한번 같이 뒹굴뒹굴 쉬어보자'라고. 아마 대한민국 수많은 집에서 그렇게 했었고 대한민국 수많은 직장인들이 한 번쯤은 바랬던 그것. 


약을 받아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근처 병원으로 가도록 했다. 혹시 몰라 버스를 타지 말라고 한 딸과 함께. 그 사이 근대된장국을 덥혔다. 몇 숟갈 밥을 말아먹어야지, 하고. 그런데 된장국이 쓴 맛만 나는 상황을 보고 짐짓 혼자 놀라고 있었다. 진짜 몇 숟갈 먹지 못하고, 구운 계란을 하나 먹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알았다. 아, 인후통, 인후통이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그 부드러운 계란 하나를 삼키지 못하겠더라. 입천장 깊숙한 곳에 매달린 고춧가루 묻은 쇠칼이 도르래처럼 앞뒤로 사그락 사그락 움직이는 느낌. 그 사이로 가래가 끓기 시작했다. 십 대 때 한참을 앓았던 축농증 증상처럼. 눈 밑이 먹먹했다. 코에서는 계속해서 노린내가 났다. 목과 식도로 이어지는 통로가 쇠칼로 뒤죽박죽 들어차 막힌 틈 사이로 짙은 가래가 비집도 들락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첫날을 아내와 함께 각자 방에서 죽은 듯 누워만 있었다. '뒹굴뒹굴 쉬어보자'는 말도 섞지 못하고. 


27일 둘째 날. 새벽에 잠을 자면서 거실 건너 들리는 아내의 기침 소리가 안쓰러웠다. 나는 기침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약을 하루치 먹고 나서 오한이 다 사라졌다. 몸이 더 이상 춥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근육통이 자리 잡은 듯했다. 목에 매달린 쇠칼 덩어리는 더 커졌다. 이 두 가지 증상이 온몸을 계속해서 침대에 붙들어 놨다. 무기력이었다. 저쪽에 있던 팔을 이쪽으로 옮기는 것도 힘들었고,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그러는 사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에 해야 했다. 구운 계란 하나를 깠다. 작은 조각의 다 식은 삶은 감자와 같이 으깼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에 밀어 넣었다. 쇠칼 덩어리가 뒤로 밀렸다 다시 앞으로 나올 때 속이 다 빠져나오는 듯한 통증, 쇳내 짙은 노린내에 이건 음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침 약을 먹고, 다시 누웠다. 그 사이 딸은 조용히 일어나 병원을 다녀온 모양이다. '아빠, 나도 확진'. 안도의 표정이었다. '뒹굴뒹굴 쉬어보자'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하지만 격리 기간 내내 가장 경미한 증상을 보인 딸도 잔기침에 밤잠을 설치는 건 아내와 마찬가지였다. 


28일 셋째 날. 역시 아내는 나보다 면역력이 뛰어나다. 완전한 외유내강의 실체이다. 나와 정반대. 아내는 아침부터 부은 얼굴에 더벅머리를 하고 씩씩하게 브런치를 주문했단다. '자기야, 브런치 하자'라는 희미한 소리를 몇 번을 듣고, 딸이 안방을 들어온 후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팔과 다리를 영화에서나 보듯이 침대에 묶여 고문당하는 느낌처럼. 가끔 호사를 누리던 가게의 비싼 샌드위치였다. 그 집에서 나는 불고기를 다져 넣은 두툼한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바로 그거였다. 그런데 일단 샌드위치 사이즈에 맞게 입을 벌릴 수 없었다. 어제보다 쇠칼 덩어리는 더 커져 있었고, 가래는 더 짙어졌다. 이제는 좁은 틈만 아니라 눈밑에서 콧구멍을 거쳐 목젖까지 가래가 자유자재로 흘러 다녔다. 날숨과 들숨 때마다 콧속에서는 짙은 가래에 방금 먹은 약물이 녹은 듯한 기분 좋지 않은 냄새, 그 병원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장갑을 끼고 분해를 했다. 그리고 따로따로 조금씩 씹어 삼켰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니, 그냥 찔끔 눈물이 나왔다. 아내가 방금 내렸다는 커피. 아니 내리는 동안에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더니, 한 모금 마셨더니 역시 맛을 모르겠더라. 미각과 후각이 유독 커피에서만 강렬하게 잊히고 있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문 앞에 두고 가신 팥죽으로 점심과 오후의 요기를 할 수 있었다.


29일 넷째 날. 정말 약을 열심히 먹었다. 약을 먹기 위해 눈물을 흘렸고, 그렇게 구운 계란 하나, 꿀물 한잔이라도 매끼마다 계속 마셨다. 지금 글을 쓰면서 보니, 가득 채워져 있던 꿀통이 5분의 1 정도만 남았다. 아내가 계속, 꿀물 꿀물 했다. 아내여서, 면역력이 쎄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꿀물에 집착을 했다. 그냥 드는 신뢰 같은 거. 아내와 같이 확진이어서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참 여러 번 했다. 그러는 사이 근육통이 거의 사라졌다. 목, 어깨, 등, 허리, 다리로 이어지던 근육통이. 그리고 목에 걸려 있던 쇠칼덩어리도 이제는 조금 큰 스프링이 되어 있었다. 삼킬 때 한 번에 통으로 꿀럭하는 크기였다. 이전 사흘동안의 쇠칼 덩어리는 전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부분 부분끼리 뒤로 밀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빈틈없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용수철 위치가 사흘동안보다는 조금 더 입구 쪽으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목구멍 저 깊숙한 곳에 있던 쇠칼 덩어리가 목젖 언저리, 입천장 끝부분에 매달린 용수철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침을 삼킬 때마다 귀밑까지 좌우로 늘어났다 돌아오듯 귀가 먹먹해졌다. 고산지에서 나타나는 고막이 부풀었다 줄어드는 느낌과 아주 비슷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용수철 틈 사이에 연한 겨자 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 같은 매캐한 느낌이 들었다. 급한 마음에 후루룩 들어마신 얼큰한 콩나물 국물이 목에 탁 걸려 아무리 해도 씻겨 내려가지 않는 느낌. 


30일 다섯째 날, 월요일. 오늘부터 마스크 착용의무가 권고를 바뀌었다고 한다. 역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구운 계란 1개에 꿀물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그리고 약을 챙겨 먹었다. 점심때는 짜장면, 탕수육, 짬뽕을 시켰다는데, 나는 탕수육 몇 개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짬뽕은 매워서, 짜장면은 너무 짜서. 딸과 아내는 괜찮다는데 나는 짜장면이 유독 소금 덩어리 같았다. 여전히 음식에서 좋은 향은 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강냉이 튀밥, 두유 1개, 귤 2개로 대신하고 약을 챙겨 먹고 다시 누웠다. '진짜 환자 같네. 벌써 오일 짼데, 룰루랄라 뒹굴뒹굴한 사람들은 뭐지?'라는 생각이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들었다, 사라졌다. 인후통 증상이 살짝 바뀌기 시작한 게 30일 저녁 이후이다. 통증 자체는 여전했지만, 정가운데서 오른쪽 끝으로 통증의 중심이 이동해 있었다. '아, 이 증상!'하고 느낄 정도로. 목감기 걸렸을 때. 심하게 몸살이 왔을 때 내게 자주 나타나던 증상이었다. 목구멍 안쪽, 오른쪽 부분이 유독 붓는 현상이었다. 그러면서 '아 이제, 돌림병이 몸살 증상으로 완화되는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만 해도 몸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서 5일 만에 처음으로 10여분 동안 가볍게 맨손 스트레칭을 했다. 스쿼트도 서너 개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31일 엿새째 날, 화요일. 건조하고 저릿한  통증에 잠을 깼다. 새벽 5시 11분. 건넌방에 있는 아내와 딸이 계속해서 밭은기침을 했다. 다시 한번 커피를 내려 봤다. 그러나 내리는 동안 커피하고 비슷한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그건 이 글을 쓰고 있는 2월 2일, 지금도 마찬가지다. 돌림병 6일째지만 여전히 후각, 미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인후통은 작아졌지만, 남아 있고, 가래가 끓어 올라 차는 속도는 느려졌지만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처음으로 음식이 맛있다,라고 느낀 건 31일 저녁. 아내가 끓인 배추된장국이었다. 첫날 근대된장국에 쓴맛만 느껴졌는데, 엿새째 날 배추된장국은 달았다. 원래 먹던 그 맛있었다. 그래서 국만 두 그릇을 먹고, 약을 챙겨 먹었다. 1시간 정도가 흘러 기분 좋게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복통이 시작되었다. 출근하게 다급하게 느껴지던 그런 느낌처럼. 그렇게 여러 번 설사를 했다. 그리고 속을 다 비웠다. 


2월 1일 격리 마지막, 날 수요일. 건넌방에 있는 딸 기침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2시 17분. 꿀물 반잔을 타주고 다시 돌아와 누웠다. 딸의 기침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제는 잘 자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침대 밑에서부터 시커멓게 긴 물체가 쑤욱하고 이불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딸이었다. 참 오랜만에 같이 누워봤다. 나를 꼬옥 끌어안고, 새근새근 귓가에서 숨을 몰아쉬면서 잠이 들었다. 기분 좋게 나도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난 딸은, 뜬금없이 '아빠가 나 꿀물 타줬다'라고 고백하듯, 고맙다고 했다. 꿀물을 싫어하던 딸이지만, 새벽녘에 달았다는 기억만 하고는 비몽사몽간에 꿀물인지 몰랐단다. 


어제 친구와 한참 통화를 했다. 우리 식구들이 그 친구의 중1인 큰 아들에게 옮았다는 사실을 안 건, 내가 친구에게 확진 사실을 알린 26일 오전이었다. 우리를 만났을 때부터 몸살 기운이 있었단다. 이틀을 같이 먹고사는 동안 많이 먹지 않고, 기운이 없는 듯했지만, 게임도 같이 하고 주섬주섬 먹고 다니길 래 진짜 감기인 줄 알았다. 그리고 하루만 자고 가려고 하니, 어릴 때부터 삼촌, 이모 하면서 못 가게 해서 하루를 더 잠을 잤다. 이 친구네는 설이고, 추석이 우리 아니면 갈 때도 만날 사람도 없기 때문에. 고향 친구끼리 결혼한 친구 부부는 우리 부부처럼 동갑이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다. 세 자매 중 장녀인 재수 씨는 전국이 흩어 저 사는 동생들을 명절에 만나기가 쉽지만은 않다. 다행인 건, 나와 친구 덕분에 만난 아내와 재수 씨는 나와 친구 만난 시간보다 훨씬 더 짧게 깊어졌다. 서로를 위로하고, 기대는 사이로. 


오늘 이 글을 올리고 나는 이제 문밖으로 나간다. 4주간의 자발적 격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3월에 새로운 고3을 만나기 전 '나도 걸려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친구의 걱정처럼, 이놈의 돌림병이 평소 그 사람이 가장 약했던 부분을 귀신같이 알고 공격하기 때문에 해제 후에도 한 달 가까이 후유증에 시달렸다면서, 아직 남아 있는 인후통과 가래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의지대로 먹고, 읽고, 쓰고, 일하는 게 참으로 행복하구나, 그 자체가 기적처럼 건강한 거구나하는, 자주 잊고 사는 세상사 진리를 찐하게 마디마디마다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기분 좋은 친구의 잔소리처럼 약처방을 조금 더 받아서 먹어야겠다. 그리고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무리하지 말고, 오래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나눠서. 


이번 주말, 재수씨가 우리 식구를 다시 초대했다. 이번에는 두 장정 - 결혼 후 오랫동안 유산, 인공 수정 등을 시도하다 포기하고는 그 다음에 연연생으로 태어난 중1, 초6 두 아들. 중1은 이미 키가 나보다 커서 180이 다 되어 간다 - 들조차 잘 먹지 않는, 장어를 집에서 구워주겠다고. 병주고 약주고 하는 친구지만, 병도 주고 약도 나눌 수 있어서 고맙고, 그 친구여서 고맙고, 옆에서 같이 잘 살아줘서 고맙고, 재수씨와 아내가 우리보다 더 친해서 더 고맙다. 올 여름에도 두 아내만의 호캉스를 친구와 같이 준비해야겠다. 돌리병으로 부터 해방되면서 더욱 더 친구에게 구속되는 것 같아 행복한 아침이다. 자, 이제 슬슬 다시 시작해볼까!, 뭐든!!


한줄요약 _ 병주고 약주는 친구여서 고맙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을 떠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