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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15. 2023

쇼핑테라피

쇼핑가디언의 조건

나는 쉬는 게 집밖으로 나가는 거다. 집에서만 있으면 그냥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든다. 역마살이다. 무슨 손해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일주일을 바쁘게 보내고 집에서 쉬기라도 할라치면, 동물원(?)에 갇힌 줄무늬 얼룩말 마냥 예민해진다. 그 예민함에 울타리를 부수면 어차피 내가 고치고 수습해야 하니까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동물원을 폐쇄하자고 나대면 더 큰일이 생길 테니 그렇게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쉴 때는 그냥 나간다. 그렇게 움직여야 생각이 사라진다. 생각이 자란다. 생각끼리 이어지고, 끊어진다. 일감을 몰아치우고 글감을 늘리는 가벼움이 숙성된다. 


그런데 이런 나의 성향은 아내 그리고 따님 덕분에 강화되었다. 아내는 장롱면허다. 그것도 획득을 한 게 사실 나는 신기하다. 겁이 많고, 안전에 대해 기본적인 부모 마음 그 이상을 가졌다. 온갖 사고에 사건에 원인과 결과에 초집중한다. 나의 가장 절친네 재수 씨보다는 십 분의 일 수준이긴 하지만. 재수 씨를 보면서 아내가 조금은 여유(!)를 가지게 된 건 정말 다행이지 싶다. 그래서 더 자주 만나야지 싶다. 그런데 무엇보다 스물두 해를 같이 지내오면서 아내는 언제나 옳았다. 이 글을 아내가 보게 될 걸 염두에 두고 알랑방귀 뿡뿡중인 건 아니다. 진심이다. 옳지 않은 것 같아 몇 번을 덤벼(?) 보았으나, 결론적으로는 아내가 다 옳았다. 


그런 아내 역시 나가야 힐링이 된다. 일팔 청춘 따님은 나처럼 원래 그랬고. 그래서 우리는 파란 날, 빨간 날은 항상 '어디를' 탐색한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매기고 출발한다. 그런데 우리 셋의 공통점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사람이 복작거리는 곳은 아무리 하테하테해도 싫어한다는 것. 또 하나는 옷구경을, 아이쇼핑을 좋아한다는 것. 서로 부딪히는 것 같은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방법은 저스트 드라이브다. 그러다 중간에 재래시장에도 들러 스트리트 이팅을 즐기는 재미도 있고. 나는 안다. 그렇게 같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이 행복이 더듬더듬 기억날 거라는 것을. 그래서 아내건 따님이건 나가자고 하면 무조건 오케이다. 


당장 올해처럼 허릿병 때문에 두어 시간 넘는 장거리 운전을 못하는 상황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으니까. 자, 다시 옷 구경, 아이쇼핑이야기. 나는 쇼핑을 가게 되면 매장과 매장이 이어진 통로에서 서성이는 남편들, 남자 친구들, 그냥 남자들 중 한 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결혼하고 얼마 동안은 나도 그런 모습(?)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표정으로 계속해서 '얼른 가자고. 그만 가자고. 그만하라고!'. 이야기하는. 그러면 그 시간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도 없다. 더 큰 피해는 쇼핑을 즐기고, 집중해야 하는 아내가 불편해진다. 돈 쓰고 몸 쓰고 시간 들여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악수가 된다.  


가방모찌란 말이 있다. 일본말이다. 좋은 의미로 번역하면 비서, 수행원 정도다. 하지만 삼가야 할 표현이다. 그런 시중을 드는 일을 하찮은 일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속되게 여기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쇼핑, 아니 쇼핑에 도움을 준 구력(?)이 이십 년은 훌쩍 넘었으니 이제는 쇼핑 조력 장인정도 되시겠다. 그래서 이 말을 무슨 말로 대체할까 혼자 많이 고민했다. 아무도 묻지도 시키지도 않았지만. 


그러다 요즘 들어 나 스스로 쇼핑가디언guardian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아직 어디에다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가디언은 보호자, 수호자를 뜻하는 단어다. 타임스와 대척점쯤에 있는 진보 성향의 유력지 영국 가디언 지와 발음이 같아 괜히 지원군(?)을 얻은 듯하다. 당위성에 당당함이 더해지는 느낌 알랄까 몰라. 그 기분 이어서 백화점, 아울렛등에서 쪼그라들지 않으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러다 덤으로 '내꺼'도 얻는 쇼핑 가디언의 노하우를 전격 공개한다. 




#첫째 조건_ 고객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

  쇼핑가디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비서, 수행원이다. 절대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마라. 주인공이 되려는 순간 공간 이동을 해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쇼핑해, 나는 지하에서 뭐 좀 먹고 있을게. 이게 뭔가. 같이 나가서 각자의 영역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 관계지향적이지 않다. 항상 고객님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서 눈에 띄는 듯 띄지 않게 사부작사부작 움직여야 한다. 쇼핑가디언의 항상 쇼핑 이후에 관계에 대해 가장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다. 삶은 한순간이다. 


#둘째 조건_음료 한잔을 반드시 준비하라

 쇼핑가디언도 인간이다. 당 떨어지고 카페인이 삭제되면 예민해진다. 예민함은 시선으로 먼저 나온다. 무의식적으로. 고객님을 향해 바라보는 그 시선. 그러나 알록달록한 구경거리에 엔돌핀이 조금씩 조금씩 넘쳐흐르는 고객님의 반짝거리는 시선에 자칫 그 예민함이 포착되면, 그때는 끝이다. 잘 차려입고, 잘 먹고 투쟁이다. 대중들 앞이라 겉으로는 누가 하나 얼른 양보한다. 쑈설 포지션 때문에 선택한 미봉책이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지면 더 예민해지고. 커피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음료 하나는 준비하자. 그리고 가끔씩 마시면서 가디언의 시선도 반짝 까지는 아니더라도 퀭한 시선은 지워야 한다.

 

#셋째 조건_적절한 움직임을 유지하라

 주르륵 이어져 있는 매대 또는 점포 중 고객님이 몇 호를 탐색하는지에 따라 적절한 움직임이 쇼핑가디언에게는 필요하다. 가운데 점포 탐색중일 때는 어쩔 수 없이 통로 가운데를 서성이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그냥 서있지 말고 왼발, 오른발 한두 발씩 움직여라. 쇼핑가디언은 적군을 향해 서있는 보초가 아니다. 이 움직임은 고객님이 오른손잡이라면 왼쪽 시선을 염두에 둔 지점쯤에서 왼발, 오른발 왔다리 갔다리 한다. 많이 사용하는 오른손으로 옷가지들을 들춰 보기 때문에 반대쪽인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쇼핑가디언의 동태를 파악하는 게 일반적이다. 단, 옆 매장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건 고객님에게 빨리 나와, 따라와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다. 아예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하고 가서 쉬어라. 그게 서로에게 안전하다.  


#넷째 조건_거울 속에 같이 들어가라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고객님이 마음에 드는 대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가져다 데본다. 그리고 전신 거울 앞까지 간다. 그럼, 일단 그 대상이 고객님 마음에 슬슬 들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그럴 때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고객님이 도착한 전신 거울 안에서 고객님 뒤에 쇼핑가디언이 위치해야 하다. 단, 겹치지 않게. 한쪽으로 살짝 비껴 서서. 고객님이 전신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데도 쇼핑가디언의 위치가 아직 통로 쪽이다.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옆 매장으로 넘어갔다? 이건 '나는 정말 관심 없거든'하는 도발이다. 전신 거울 속에서 그윽한 미소를 지어라. '잘 어울려. 와우~ 좋은데'하는 표정으로만. 단, 명심하라. 최종 결제 전 자기 생각으로 표현할 내용을 정리하면서 거울 앞에 있어야 한다. 우린 쇼핑가디언이다. 적극적인 자기 의사 표현은 임시 저장해 두라. 쇼핑가디언의 미소에 고객님이 같이 웃으면 슬슬 그 대상으로 결정하려고 하는 거다. 그때다. 좋아, 안 어울려를 결정할 타임이. 단, 아직 표현은 하지 말라. 


#다섯째 조건_피팅룸을 확보하라

  고객님이 이거 입어봐도 돼요 하는 순간은 순식간에 온다. 온 정신을 초집중해도 가끔 잘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전신 거울 앞에서 두 번 이상 고객님이 머뭇거린다면 빨리 움직여라. 피팅룸 앞으로. 그리고 사용 중인지 비었는지를 확인해라. 비어 있는 칸이 있으면 그 앞을 지켜라. 하나뿐이 없는 피팅룸이 사용 중이라면 전신 거울 앞을 서성이는 고객님에게 시선으로, 수신호로 알린다. 사용 중이야 하고. 그러면 고객님은 마음에 드는 대상을 옷걸이 위에 척 걸쳐 놓고 다음 대상을 물색하는 시간으로 알뜰하게 활용하게 된다. 이런 디테일함을 고객님은 친절하다고, 센스 있다고 좋아라 하신다.


#여섯째 조건_옆집, 앞집 물건을 교차 확인하고 정보를 제공하라

  이 조건은 이럴 경우에 필요하다. 고객님은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쇼핑가디언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면 고객님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옆 매장으로 넘어가라.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옷걸이에서 비슷한 컬러, 스타일의 옷을 찾아내라. 그리고 얼른 가격을 확인한 후 빼내고 들고 있어라. 그러다 고객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쇼핑가디언으로 넘어와 맞닿을 때 들고 흔들어 보여라. 여기도 비슷한 거 있는데 이게 더 좋아 보여 그리고 가격도 착해라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매장에서 하루 종일 고생하는 자영업자님까지 배려하는 차원에서 침묵으로 전해야 하는 건 상도덕.


#일곱 번째 조건_틈틈이 맨몸 운동을 하라

  생활 근육이 진짜 근육이듯 찐 체력은 쇼핑 체력이다. 여섯 가지 조건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칭을 하라. 단, 기지개는 금물. 고객님의 입장에서는 지루해서 몸이 찌푸두두둥~ 하다는, 빨리 쇼핑을 끝내라는 잘된, 아니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는 동작이다.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제자리에 서서 두발을 살짝 벌린다. 그리고 뒤꿈치만 들어 올리는 거다. 그렇게 몇십 번, 몇백 번을 해도 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종아리가 당당해지는 기분 좋은 느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고개를 사십오 도를 오른쪽으로 돌려 숙이고 오른손바닥으로 왼쪽 귀부분을 잡고 역시 사십오도 아래 방향으로 지그시 당긴다. 승모근 스트레칭이다. 




말을 안 하면 아주 가까운 사이라도 모른다. 쇼핑가디언의 노하우를 공개한 이유다. 집집마다 상황에 따라 빈도는 다르지만 외출을 한다. 그러는 사이 가끔은 소중한 쓰리 콤보(몸쓰 돈쓰 시간쓰)을 양껏 활용하고 서로의 마음이 힘들어질 때가 있다. 먹고 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나누는 게 인생 여행의 전부가 아닐까. 위에서 말한 쇼핑가디언의 조건들의 핵심은 당연히 쇼핑 자체가 아니다. 삶을 안전하게 지켜내고 고객님 및 쇼핑가디언의 정신과 영혼을 힐링시키는 테라피이다. 남편들이여, 남자 친구들이여, 그냥 남자들이여. 일하는 체력, 게임하는 지구력, 사람 만나내는 인내력, 회식력(!)을 기르고 싶으면 쇼핑가디언을 자처하는 게 어떨지. 그렇게 쇼핑테라피에 빠져 보시라. 백일 이내에 큰 효과를 보실 거라 장담한다. 특히, 하체의 힘과 마음이 길러져 '뭐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하는 나를 발견하는 기쁨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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