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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13. 2023

7초의 흔들림

생활필수 아이템 시리즈1....사진: Unsplash

지난주부터 일팔청춘 따님과 같이 출근한다. 학교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주면 서울로 들어가고, 나는 학교로. 그래서 평소보다 십여분 늦게 사무실에 올라오니 벌써 커피 향이 한가득이다. 앞에 계신 김쌤이 나를 기다리다 급한 마음에 커피를 먼저 내렸다고. 그러면서 같은 원두인데 내가 내리는 커피맛이 나질 않는다고. 김쌤은 하루 딱 한잔을 마신다. 기분 좋은 아침 인사를 받으며 남이 내려 준 커피를 마신다.   


보통 출근하면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올라 올 때까지 보통 사오십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일찍 한가로이 나가는 가장 큰 이유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밤새 안녕인 컴퓨터를 부팅한다. 각종 메신저가 먼저 빼꼼히 나를 자동으로 알아본다. 업무용 메신저도 카톡에도 문자에도 파랗고 노란 수신함에 빨간색 숫자가 수북하다. 하지만 바로 확인하지 않는다. 공식 업무 시작 전 이다. 오로지 나의 시간이다. 


참 이런 부분도 많이 변했다. 나란 사람이. 예전에는 뭐 그리 급하다고 그 빨간 숫자들을 먼저 해결하려고 기를 썼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일도 나도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일머리 좋다, 잘한다, 능력있다는 게 말이 이제라도 '왜 그러니'라고 읽히기 시작한 건 정말 다행이지 싶다. 커피 한잔이 또로록 내려오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나였나 보다. 

 

숫자를 없애는 대신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는다. 사무실에는 내가 집에서 가져다 놓은 두개의 그라인더가 있다. 하나는 핸드 드립용, 하나는 자동 그라인더. 핸드 드립은 주로 수요일, 목요일 아침에 이용한다. 그 이틀은 강의 시작이 10시, 11시 정도부터 시작하는 날이다. 반면에 자동 그라인더는 월, 화처럼 9시 이전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바틋한 날에 이용한다.



커피 맛 감별사(?)는 아니지만 두 방법에는 향이나 맛이 다르다. 같은 원두라도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는 향이 진하다. 그리고 여러가지 맛이 순서대로 혀와 목을 자극한다. 물론 거칠게 또는 좀 더 곱게 원두를 갈수 있는 조작은 가능하다. 하지만 번거롭다. 한 번 셋팅된 상태에서 사용하게 된다. 아마도 시간적인 여유가 다른 요일보다 더 많은 날은 미각과 후각에도 여유가 생겼지 싶다. 


내가 사용하는 자동그라인더는 뚜껑형이다. 집에서도 쓰고 있는 가격대비 성능 너무 좋은 그라인더다. 뚜껑을 열고 원두를 넣은 뒤 닫는다. 그리고 뚜껑 부분을 살짝 누르는 방식이다. 처음 사용할때는 익숙하지 않아 손목 힘 조절에 실패하곤 했다. 마지막 몇바퀴에 칼날이 돌아가는 데 그만 뚜껑을 열었다. 순식간에 커피 하루가 하얀 셔츠 가슴쪽으로 그리고 콘센트로 화분위로 파바박 날아다녔다. 지금은 손목으로 힘조절을 하면 원두 가루의 굵기 정도를 눈을 감고도 조절할 수 있다. 


이 자동그라인더는 많은 양의 원두를 여럿이 나눠 먹기에 적합하다. 내가 원액을 내려 놓으면 같이 모여 근무하는 다른 세분이 왔다 갔다 하며 나눠 마신다. 그래서 원액을 좀 더 진하게 내린다. 진하고 연하고의 차이는 딱 7초다. 그러면 넷이 한잔씩 나눠 먹기 충분하게 진하다. 왼손으로 뚜껑 부분을 누른 채 오른손을 사용해 자동그라인더를 들어 준다. 그리고 돌아가는 동안 살짝 앞뒤로 흔들어 준다. 그러면서 속으로 하나, 둘, 셋... 칠을 센다. 그러면 향이 진한 보드라운 원두가루가 소복해진다. 500미리 드립포트에 절반 정도 끓인 물을 드리퍼에 천천히 붓는다. 그렇게 두 번. 네 명이 한 두잔을 향 좋게 마실 수 있는 커피 원액이 만들어진다. 김쌤과 민쌤은 연하게 마신다. 


이렇게 주 5일.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게 일상이고, 업무를 시작하는 나의 시그널이다. 그 시그널처럼 일상도 그렇다. 업무도 개인적인 일도. 무엇인가를 해결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매뉴얼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업무 매뉴얼이건 개인적으로 정해 놓은 루틴이건. 오히려 그것을 해결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 그게 힘들다. 밥 먹는건 후다닥이다. 밥거리를 구하고 만드는 과정이 시간과 연속 동작, 정성이 더 필요하듯.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앞선 과제는 밥을 먹을까 말까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커피를 조금 더 진하게 만들고, 향을 더 잡아두고. 이런 과정에는 플러스 마이너스 딱 7초의 시간과 적당한 흔들림이 필요하다. 그렇게 관심이고 몰입하는 에너지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그리 실제 큰 시간과 비용이 들지 않는다. 7초쯤의 흔들림. 짧은가. 지구의 둘레는 약 4만 6,000킬로미터다. 그 거리를 24시간 동안 돈다. 그렇게 지구는 초당 약 530미터를 움직인다. 7초면 3.7킬로미터를 움직이는 시간이다. 그 거리는 충분히 나를 좀더 설렘으로 차분히 기다리게 만들 수 있다. 그 기다림이 혼자와 여럿, 후다닥과 기다림, 비기너와 프로, 숙성과 속성, 흥분과 안정을 가르는 속도이다. 7초를 염두에 두는 생각 습관, 잘 쓰면 내 삶을 넉넉하게 채워주는 약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편의점 갔을 때 내가 문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떳을 때,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_나의 해방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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