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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28. 2023

공이 다섯 개~

지금 근무하는 곳은 나의 시골 모교 중학교와 같습니다. 교문 하나, 그라운드 하나, 학교 둘. 높은 앞 건물은 고등학교, 뒤에 숨은 듯 낮은 건물은 중학교. 그래서 산책을 하다 보면 안녕하세요. 어, 고등학교 쌤이세요 하는 넉살 좋게 개구져 보이는 중학생들을 가끔 만나기도 합니다. 묵직하게 주눅들어 있는 이파리들 위로 나풀거리는 나비들 같습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에 햇살 좋고, 바람도 좋은.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딱 노래 같았습니다. '뷰리풀 데이~ 오~오~오~ 썸띵 굿~~~'  


5층 사무실은 탁 트인 뷰가 일품입니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다 보니 좋은 점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바로 그 뷰를 자주 내다 본다는 겁니다. 허릿병 덕분입니다. 모니터에 빠져 있다 오른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먼 산이  눈 앞입니다. 창가로 조금 다가가 목을 살짝 내밀면 네모 반듯한 그라운드가 보입니다. 그라운드는 아주 질서 정연합니다. 몇 개반이 동시에 체육 수업이기 때문입니다. 학급마다 한 명의 체육 선생님이 각자의 영역이 겹치지 않게 진행하니까요. 


그래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체육 시간에는 오히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다니지는 못합니다. 평가를 연습해야 하고 셔틀런도 해야 하고 팝스PAPS - 예전의 체력장 - 도 준비해야 하고. 그래서 그런지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꽤나 있는 것 같습니다. 벤치에 의자에 돌턱에 걸터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게 간만에 여유로워 보입니다. 눈이 마주치면 넙죽 인사를 하면서. 산책같은 시간처럼 보여 여유가 넘쳐 보이기도 합니다. 네모 반듯한 교실을 벗어나 네모 반듯한 그라운드에서 만나는 숨통이겠지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종목은 축구입니다. 남고를 졸업한 나도 체육 시간이 되면 공만 찼던 기억뿐입니다. 선생님이 공을 주고 놀아라 하면 끝이었지요. 물론 그때도 다른 것을 하기도 했겠지만 신기하리만큼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축구뿐이. 그렇게 기다려지는 시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네모 난 그라운드가 동글동글해지는 시간이 바로 점심 시간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산책하는 척 숨어있던 선수(?)들이 자기 진가가 발휘하려고 모여듭니다. 


5층에서 내려다 보는 점심시간의 그라운드. 보통 2개 정도의 공이 굴러, 날아 다닙니다. 축구공만 그렇습니다. 그라운드 건너 편 코트에서 날아다니는 갈색 농구공, 오른쪽 구석에서 주고 받는 자그마한 야구공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무려 5개의 축구공이 한 공간에서 왔다 갔다 하더군요. 너무 신기하고 기특하고 귀엽고 경이로워서 한컷 찍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사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그런거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듯 합니다. 


우리 학창시절때도 그랬습니다만, 참 여전히 신기한 장면들입니다. 축구공이 2-3개면 적어도 양쪽으로 4~6개팀이 한 장면속에 섞여 뛰는 겁니다. 그렇다면 11대 11의 제대로 된 정식 시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마흔명이 넘는 장정들이 서로 뒤섞여 뛰어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한명도 자기 공을 놓치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쫓아가고 도망칩니다. 공을 가져도 공이 없어도. 


그리고 점심 시간 내내 한 건의 충돌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위치를 분주하게 바꾸면서 완전 몰입된 상태입니다. 오직 자기팀의 공만 쳐다 봅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차고 다니는 축구공마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현란한 칼라나 디자인은 또 아닙니다. 오히려 비슷합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똑같은 체육복을 입고 뛰어 다닙니다. 물론 학년별로 얇은 스트라이프 색깔로 구분은 되지만 같은 남색 바탕에 당연히 백넘버도 없지요. 그러면서 모두가 똑같이 마이 마이를 외치면서 공을 쫒아 다닙니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고 건강해 보이는 걸 넘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보이지 않은 질서가 엄격하게 잘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라운드의 룰이 명확합니다. 속도와 방향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섬세합니다. 서로의 영역은 겹쳐져도 탐내지 않습니다. 옆으로 흘러 온 다른 팀 공을 조심스레 넘겨주는 여유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 보고 있자니 움직임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그 아이가 그 아이 같습니다. 짙은 홀로그램 같습니다. 그라운드 그 자체가 아름다운 플랫폼입니다. 한 명 한 명이 쉰내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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