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freepik
학교 가고 오면서 그렇게 눈독을 하루 이틀 들인다. 그러면 초록빛이 샛노란 빛으로, 마치 산괴불주머니처럼 변한다. 그러면 한 두 개를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른 먹거리들에 밀려 하루 이틀 더 방치하게 되면 사진처럼 갈변이 시작된다. 그러면 엄마는 한 두 개 남은 갈변된 바나나를 벗긴다. 물컹해지는 경우도 자주다. '버리기 아까워서' 믹서기에 설탕 대신 넣고 토마토, 사과, 당근 뭐 이런 것들이랑 갈아 버렸다.
단맛에도 집 단맛이 있다. 시원한 육수 국물처럼, 달짝지근하게 볶아 낸 뽀빠이같이 바삭한 지리멸치처럼. 집밥처럼. 엄마가 갈아주던 흐물거리는 바나나가 들어간 주스가 집 단맛의 으뜸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아이들에게 세계지리 수업을 가르치면서 알았다. 갈색으로 변한 바나나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숙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토마토, 멜론, 망고, 키위, 복숭아, 사과, 아보카도, 두리안처럼 바나나 역시 익기 전에 수확하는 전환성 과일 climateric fruit이다. 딸기나 베리류, 포도처럼 다 익어야 수확하는 비전환성 과일에 비해 바나나는 숙성이 되어야 맛있다.
그래서 어제 집에 돌아다니던 - 참, 바나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 바나나는 상한 게 아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버려지기 전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절정의 바나나였다. 자기 맛에서. 자기 역할에서.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숙성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조그만 상처에도 여전히 픽, 픽 거리지는 않는지. 파르르 떨다 혼자 퍼덕거리기만 하는 건 아닌지. 속도감에 빠져 사는 건 아닌지. 산괴불주머니의 꽃말이 '보물주머니'이다. 몸나이 들면서 내 마음에, 허리춤에도 보물주머니 여러 개 정도는 이제부터라도 달고 살아야지 싶다. 지혜 주머니 하나, 사랑 주머니 하나, 돈 주머니 하나, 깨방정 주머니 하나, 글감 주머니 하나. 지금처럼 쓰면서 그 주머니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가족들이, 가까운 이들이 더 신나게 살아내는 데 필요한 도움을 나눠 줄 수 있는, 그런 나의 숙성된 절정의 순간을 늘리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