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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01. 2023

Drama.1

[일상여행1] ... 사진:unsplash

1998년. 돌아보니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다. 영화 <트루먼쇼>를 지금은 없어진 영화관에서 보고 나오던 뒷덜미의 서늘함이 지금도 남아 있다. 뒤통수를 거세게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하늘을, 사람들을 더 쳐다보고 모두가 다 내 인생을 위해 셋팅된 배우들, 세트들일거라고 멋쩍게 두리번 거렸던 기억이. 코믹 연기 대장 짐 캐리가 주인공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솟아 올라온다. 


중학생때까지. 엄마는 8시가 넘으면 잠이 들었다. 그냥 드는 게 아니라 잠에 취해 버렸다. 그 시각 TV 앞은 언제나 아버지 차지였다. 그리고 그때의 아버지는 세 가지에 빠져 있었다. 동물, 뉴스, 스토리. 아버지는 자주 드라마속 배우들과 대화를 하셨다. 졸다 보다 혼내다 훈계하다 헛기침으로 훌쩍거리는 당신을 가리다. 지금 나처럼. 지나고 보니 그게 말 상대없는 아버지의 대화법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초저녁 잠이 많아서라 생각했었는데, 새벽에 도시락을 싸러 일부러 그렇게 누워버릇 하셨다. 그렇게 자버릇 하니 졸린 거였다. 지금 나처럼. 그때는 몰랐다.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린 그때는 그런 장면보다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했었다. 운동 끝에 늦게 시작한 공부를 하려고. 목표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하려고. 그래서 집을 제대로 떠나려고.  


사람들이 스토리에 빠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자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와닿기 때문이다. 수업 내용보다 스토리가 더 오래 기억 되는 이유이다. 그런 자기 이야기, 자기 삶의 언저리 어디쯤에 있는 스토리를 아주 맛있게 만들어 내는 매체가 드라마다. Drama. '행동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그리스어 'dran'과 '결과'를 뜻하는 명사 어미 'ma'의 합성어다. 즉 드라마는 행동한 결과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 행동 때문에 그렇게 당하는 게 싸다, 고 공감하는 인과응보의 진리가 맛깔나게 농축되어 있는 거다. 


‘드라마(Drama)’는 고대 그리스의 교육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기성 세대들은 바르게 살라고 설교하는 것보다 역사 속 교훈을 '연극'으로 연출하여 직접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 봐도 참 다행이다 싶다. 접근 방식이. 그렇게 드라마라는 영역이 탄생하였다. 드라마는 직접 보여주는 교육 자료였던 거다. 일상에서 분명 나는 주인공이다. 그렇게 살건 살지 못하건 간에. 나의 일상은 내꺼니까. 그리고 나를 둘러싼 타인 - 가족, 학교, 직장, 커뮤니티 등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 - 을 관객으로 하여 나를, 나의 자아를 연출하는 실생활 연극이다. <트루먼쇼>가 맞다. 


무대위에 선 나는 직면한 무대의 상황을 나름대로 상황 정의한다. 의미를 부여한다. 나를 둘러싼 관객들에게 내가 의도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다. 실생활 연기다. 그 연기를 통해 생활 주름, 생활 근육을 얻는다. 그 과정에 내가 동기부여한 다양한 신호를 활용한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범주안에서. 혈액형, 성격 유형, 라이프스타일, 말투, 눈빛, 메이크업, 헤어, 선호하는 칼라,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는 장소, 좋아하는 음식, 마음이 편안해 지는 친구, 자주 걷게 되는 길, 답답하면 전화하고 싶은 사람. 이 모든 게 내가 동기 부여하는 온갖 신호들이다. 


나의 일상은 타인과 상호 작용하며 그들이 보는 나의 장면을 관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연속된 자기만의 루틴, 움직임에 힘을 주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자양분. 그게 내가 주인공인 그 드라마의 배경 음악과 가슴에 와 닿는 대사이다. 그래서 특정 영화나 드라마가 음악으로 대사로 더 기억남는 경우가 많다.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장면이 떠오르는 식으로. 그 대사가 뜬금없이 기억나는 식으로. 나의 그때가 휘리릭 연결 장면으로 지나가는 식으로. 


물론 켜켜이 새로운 씬들이 늘어나면서 음악과 장면이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찾아 보고 더듬거리면 그때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 추억은 그 당시 자신의 처지, 상황, 감정이 뒤섞인 빛바랜 장면과 맞닿아 있다. 연출이 잘못된 장면, 너무나 완벽한 장면, 얻어 걸린 장면 그리고 잊혀진 장면. 그 모든 장면이 나의 일상이고 내 인생이었던 거다. 


예전에 아이들은 드라마, 영화 한 두편에 진로를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나의 장면 연출도 서툴렀던 때다. 지금보다 훨씬 까탈스런 주인공이었다. 홍익 인간의 이념으로 온 세상의 아이들을 구할 줄 알았던 때다. 그래서 영상 한두편 보고 자기 미래를 결정해, 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바라본 시기였다. 그건 다 가짜다, 실제는 달라, 라는 비합리적 신념이 나의 장면에 가득했던 때다. 다른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의식속에는 언제나 tv앞에서 졸고 있는 아버지, 따로 잠에 빠진 엄마의  그 장면이 이쉬움 진하게 남아 있어서 일지도.  


하지만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에 있는 오늘도 나의 드라마에 장면을 추가하러 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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