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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05. 2023

왔어! 왔어? 응, 왔어!

노동절날. 아이들은 고3 첫 중간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시험이 잘 끝나고 조기 퇴근을 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햇살 좋은 날 갑자기 일찍 퇴근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아침에 달려간 길을 다시 느릿느릿하게 핸들 위에서 손가락을 튕기며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엔돌핀이 흘러넘친다.  


집에 오기 전 일팔 청춘 따님과 통화를 했다. 이유는 언제나 궁극적인 행복한 목적, '뭐 먹을까'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따님의 시그니처를 부탁했다. '싫은데, 내가 왜, 얼마 줄 건데....'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못내 좋아진 기분이 귀를 통해 마음에 와닿았다. 하나도 막히지 않는 오거리를 통과해 집 앞까지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그렇게 메이데이 늦은 점심은 따님이 만들어 준 계란 볶음밥. 참 맛있다. 밥도 맛있고, 같이 먹어서도 맛있고. 아랫배도 엔돌핀처럼 조금씩 흘러넘치는 걸 느끼면서 고추절임을 깨물었다. 식탁 아래에서 내 양다리 사이로 까만 눈을 꿈뻑거리는 타닥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오늘 햇살 좋아. 일찍 와짜나. 밥도 맛있쨔나. 누나도 이짜나.   


그렇게 나는 밥을 먹자마자 타닥이의 눈빛에 끌려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타닥이 입장에서 이 시간에, 이 햇살에 산책이라. 너무 행복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아홉 살. 셋 다 낮에 집을 다 비우니까 산책은 일단 주말로 몰린다. 게다가 주말에 이런저런 일이 있으면 다시 밀리고. 미안하다. 


출근과 퇴근, 평일과 주말, 분리수거와 산책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닌 타닥이와 그렇게 집 주변을 삼십 분 넘게 걸었다. 노즈 워킹하는 모습이 나보다 엔돌핀이 세배쯤이 더 흘러넘쳤을 것 같았다. 장이 다 빠져나올 듯이 시원하게 응가를 두 번이나 하면서. 얇은 배변봉투를 사이에 두고 손가락에 느껴지는 말캉거리는 따듯함에 내가 기분이 좋아진다. 


산책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따님한테 타닥이 목욕을 부탁한다. 허릿병으로 생긴 루틴이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목욕시키는 게 어려운 동작이 되었다. 그리고 재활치료사도 극구 말리는 자세다. 일단 숙이지 말란다. 타닥이가 목욕을 하는 동안 오후의 헬스장을 독차지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단지 내 헬스장으로 향했다. 


잠깐의 스몸비가 되면서 문 앞까지 도착. 세 번째 비번을 눌렀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제야 머리를 들어 입구문을 봤다. 오늘은 휴무일입니다. 아 메이데이. 참, 밥 벌어먹고사는 게 용하다. 이런 하찮은, 짧디 짧은 기억력.  


집 나간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집에 들어왔다. 정수기에서 물을 한잔 내려 마셨다. 토필-나만의 쓰는 공간. 베란다를 리뉴얼해서 만든 나의 서재. 일도 보고 글도 쓴다-로 가서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집은 조용했다. 안방 작은 욕실에서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타닥이가 낑낑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물 한잔 마시는 동안 부팅된 컴퓨터에서 자주 듣는 라디오를 실행시켰다. 


비트 빠른 팝송이 흘러나왔다. 볼륨을 살짝 올렸다. 그때쯤 '아빠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당연히 '응'했다. '왜 왔어?' 한다. 오늘 쉬네 했다. '아, 놀랬잖아. 아빤 분명히 갔는데, 갑자기.....' 나중에 타닥이 목욕시키고 나온 따님한테 또 사과했다. 그런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겁 많은, 범죄물 즐겨보는 따님은 잠깐이라도 엄청난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리라. 


따님이 지하주차장 바닥을 찍어서 언젠가 보내준 사진


멀쩡하게 생긴 스물셋이 몹쓸 짓을 했다는 뉴스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생긴 걸로 사람 판단하는 거 아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은 험상짓게 생겼으면 그냥 무서워 한다. 당연하다. 그런데 멀쩡하게 생겨 잔혹한 짓을 저지르면 더 무서운 한다. 왜, 그런 인상을 가진 사람은 주변에 엄청 많으니까, 하면서. 그러다 갑자기 메이데이의 기억이 솟구쳤다. 다시 한번. 집에 사람이 들고 날 때 나와서 배웅하고 맞이하듯이, 인기척 좀 하자, 아빠야.  딸, 미안해.


따님이 손(?)을 보고 언젠가 보내준 사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다짐을 또 해본다. 이번주도 잘 다녀오겠다 먼저 인사해야지. 그리고 다녀와서는 먼저 나 왔어! 하고 인사해야지. 일하다가 방에 있다가 나와서 응, 왔어? 하고 눈 맞추며 인사해야지. 금방 못 나오는 상황이라면 목소리라도 크게 크게 왔어? 하고 인사해야지. 오늘도 고생했어! 하고 먼저, 먼저 인사해야지. 그 목소리, 그 눈빛은 어린 이 일수록 평생 마음으로 영원히 기억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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