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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27. 2023

5594 5934 5249

머리가 무거울 때는 산책을 나가는 게 제일 좋다. 퇴근이 많이 늦어도 단 십분이라도. 그러면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내 머리보다 다른 이들의 활기찬 걸음걸이를 보면 마음까지 가벼워진다. 몸이 무거울 때는 헬스장에 가는 게 낫다. 운동하는 이들을 잠깐 감상(?)만 하고 오더라도. 평소 잘 쓰지 않는 작은 근육들을 일부러 힘들게 해 주면 엔도르핀이 조금 더 나온다. 그러면 샤워 후 몸이 훨씬 더 가벼워진다. 언제나 다시 나가는 그 자체가 문제이지만. 


이번 주 월요일도 그랬다. 반차를 쓰고 어머님을 대학 병원에 모셔가 반나절 내내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십여분 진료. 그나마 우리는 진료 시간이 길었다. 의사분이 어머니 상태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얻은 게 다음 주 일정이다. 오늘 오전중으로 코로나 PCR 검사, 결과에 문제없으면 월요일 오후에 입원. 다음 주목요일 CT 촬영 및 조직검사 여부를 판단하게 된단다. 안 그래도 막히는 월요일 퇴근길. 평소보다 삼십여분 늦게 집에 도착했다. 13층 우리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운동할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 생각 없어야 다시 나갈 수 있다.


단지 내 2층 헬스장 입구에 도착. 저녁 7시가 조금 안된 시각이었다. 안에서는 이미 여럿 주민들이 운동 중이었다. 나는 출입문 비번 5594를 눌렀다. 숫자들이 일제히 번쩍이면서 띵띵띵. 거부음이 울렸다. 비번이 틀렸단다. 어, 뭐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때 한분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계단을 올라왔다. 퇴근 후 비슷한 시각에 겹쳐서 운동을 하던 키 큰 분이었다. 내 뒤에 줄을 서는 모양새로 계속 통화를 했다. 곧 끝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눌렀다. 5934. 다시 번쩍번쩍 띵띵띵. 또 거부음이 세 번 울렸다. 관리사무소에서 이번 분기에 등록한 주민들한테만 비번을 문자로 보낸다. 그걸 찾아보려고 휴대폰 문자로 들어갔다. 없다. 깔끔하게 며칠 전 몇백 개의 문자를 삭제했던 게 냉큼 기억났다. 그러는 사이, 파란색 운동 셔츠가 상의에 달라붙은 듯 한 키 작은 한 분이 올라왔다. 딱 봐도 가슴이 온몸을 당기고 걷는 걸음걸이였다.


내가 폰을 보는 사이 그분이 비번을 눌렀다. 5293. 그분이 어 안 맞네? 하는 사이에 띠리띠리띠리띠리~ 하면서 검은색 바탕에 123 456 789 *0#의 흰색 숫자들이 번쩍번쩍거렸다. 여러번 그랬다. 이십몇 초는 훨씬 넘기면서 계속 번쩍였다. 통화를 하면서 먼저 올라온 키 큰 분이 뒤에서 그런다. 자꾸 틀려서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역시 비번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40-50대 우리 셋은 번쩍이는 번호키 앞에서 하염없이 숫자만을 들여다보는 동료가 되었다. 순간. 기억 근육을 키우는 동작이 뭔지 찾아서 배워봐야겠다, 고 셋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두커니 문 앞을 지키는 셋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던 이십 대 남자분이 문으로 다가와 버튼을 누른다. 휘리릭~ 하면서 문이 열린다. 순서대로 들어서는 우리 셋을 향해 외쳐준다. 오이구삽니다. 마치 군인같았다.


동네를 산책하다 아내가 갑자기 묻는다. 자기야. 아까 그 집. 모퉁이에 있는 전기구이 통닭. 그 집. 이름이 뭐였지. 응? 아, 최가네. 아니. 최고집. 아닌것 같은데. 그리고 이내 검색을 해본다. 자기야. 최고네 였어. 최고네. 그래도 이건 약과다. 엊그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양치를 하려다 에퉤퉤. 오른쪽에 있던 튜브를 치솔에 꾸욱 짜서 쓱쓱 세 번 어금니를 닦았는데, 미끄덩한 고수향 같은 냄새의 거품이 입 한가득. 아내의 클린징이었다. 몇번을 헹궈내도 혀와 천장 사이에 휴대폰 보호필름이 한 장 계속 있는 것 같다. 어휴, 머슬만큼 머리 쓸 동작도 찾아서 얼른 시작해야지 싶다. 이번 연휴에는. 그래도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지 싶다. 이렇게 쓰고 있어서. 어머님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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