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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09. 2023

깊이

사진...unsplash

얼마 전 철인 3종 경기(트라이애슬론)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뭐, 그런 정도의 체력이나 지구력은 아직 아닙니다만 그래도 달리기, 라이딩은 이제 어느 정도 아마추어 수준으로는 즐기는 상황입니다. 허릿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천천히 달리고, 페달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달리기, 라이딩이 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몸상태가 되더라도 철인 2종 경기에만 출전해야 할 듯합니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살았던 광산촌. 시커먼 하천이 초등학교 앞을 흘렀습니다. 겨울이 되면 아이들과 그곳에 모여 얼음배 놀이를 했습니다. 서너 명이 한 얼음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뺑돌려 얼음을 깹니다. 다른 편 애들도 그렇게 얼음배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기다란 작대기를 가지고 출렁출렁, 쿵쿵거리면서 놀았습니다. 시커먼 얼음이 장난감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해를 잘 놀다 어느 해 그만 쿵 하고 부딪히는 힘에 미끄덩하면서 두꺼운 얼음 밑으로 쑤욱하고 빠져 버렸습니다. 양 손바닥에 얼음 배 밑을 바치듯 그렇게 누운 자세로 흘러 내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차가운 공포를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 있던 몸서리치게 차가운 답답함. 우왕좌왕하는 친구들의 발바닥만 간간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분명 죽음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눈으로 코로 목구멍으로 넘나드는 싸한 석탄물이 내 몸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습니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아마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전학을 내려간 그 해 겨울이었거든요. 그냥 그렇게 죽는 게 시커먼 얼음물속에서도 참 싫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고 미안하고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죽기 싫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기 싫었습니다, 분명. 그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인 공포감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나의 팔다리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얼음배와 얼음배 사이 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열개의 손가락을 펼쳐 걸었습니다. 누가 나와 같이 놀았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랬는지는 흐릿해져도 열개의 손가락의 갈라지는 듯한 미끌거리는 냉기는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나는 살기 위해 양손을 걸치고 두 다리를 버둥거렸습니다. 쉴 새 없이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습니다. 아, 그러다 어느 순간 발바닥에 땅이 닿았습니다. 아, 그제야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같이 있던 친구들이 작대기로 얼음배를 밀어서 틈이 벌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얼음배 위에서 물로 펄쩍하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 옆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는 겁니다. 시커먼 하천은 나만한 친구의 무릎을 간신히 가릴 정도의 깊이였던 겁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서 있을 수 있던 곳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순간의 공포가 정신을 못 차리게 했던 겁니다. 물속에서 숨도 못 쉬고 말도 못 하고 단박에 죽는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세 살 터울인 남매를 키울 때 일 년을 넘게 수영장에 데리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수영장이 집에서 좀 떨어져 있어 차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한 두 달이 지나면서 남매들의 성화에 나도 같이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물에 들어가지 않았던 게 오래라 자유수영은 못했지요. 강습을 받으면서 강사님께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남매들한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일주일 넘게 불성실한 수강생으로 억지로 억지로 어린이들이 수영하는 얕은 곳에서 걸어 다니기만 했었네요. 마치 재활 치료를 하는 어른처럼. 가장 깊은 곳에서 배영을 하는 데까지 8개월이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어릴 적 그 이후로 분명 물에 대한 공포감은 다른 어느 것보다는 살짝 크게 남아 있는 건 사실입니다. 물론 물뿐만 아니라 그 어떤 깊이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는 없지 싶습니다. 분명한 건 그 깊이를 알아가는 방법, 과정이 우리가 조금씩은 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려움, 불안,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은 깊이의 절댓값에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얕아도 더 크고, 어떤 이에게는 깊어야 안심이 될 수 있는.


결국 자기에게 필요한 합리한 근거들을 찾아 넉넉하게 장착했다 스스로 오판하면서 자기변명과 자기 연민 사이의 외줄 타기로 그 상황에 대처하려는 심리적 습관이 진짜 위험한 트라우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은 물론 타인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나는 원래 이래, 어쩌라는 식의 못난 어른이 되는. 하지만 그런 트라우마가 말 못 하는 어린 생명을 땅속에 파묻는다고 지워지거나 옅어지는 게 아닌데도 그런 선택을 합니다. 진짜 어른은 딱 한 가지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 지. 사. 지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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