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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27. 2023

눈이 달아지게

그러니까 어른이잖아요

살다 보면 피곤해서 달달한 게 당길 만큼 당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음식으로, 잠으로 잘 충전했다고 출발해도 잘 쓰는 와중에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맥이 빠지고, 기가 빨리고. 그럴 때 자그마한 사탕 하나, 시원 달콤한 과일 한 조각, 심지어는 적당한 온도의 냉온수 한잔을 마시면 몸이 살아나는 걸 느끼게 됩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화분 속에 숨어 있는 씨앗들처럼 우리 몸속에도 그렇게 많은 씨앗들이 꿈틀거리면서 발화를 준비하는 거니까요.   


도로에서 가끔 만나는 비보호 좌회전. 보통은 차량이 적은 곳에 지정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차량이 제법 많은 중심 사거리에서 조차 알아서 좌회전을 하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실제 아드님이 생활하고 있는 동네에서는 그렇더군요. 그런데 그게 그만큼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라는 거겠다 싶어 지더군요. 신호등에 완벽하게 의지하지 않은 채 자기 상황은 자기가 판단해야 한다는. 물론 그 판단한 일정한 룰에 근거해서. 


어제는 한 달이 훌쩍 넘는 시간만에 아내와 생맥주 한 잔을 했습니다. 동네 골목에 숨어 있던 - 원래 있던 곳일 텐데, 우리한테는 이제 발견된 - 낯선 곳을 선택해서. 열여덟 따님도 함께.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전기 통닭구이. 담백한 맛에, 친절한 젊은 사장님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더욱 맛나게 달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생맥주 한잔씩을 먹고 한잔을 더 시켜 나눠 먹었습니다. 


꽤나 선선해진 바람을 셋이서 함께 맞으면서 걸었습니다. 집 앞에는 열여덟 참새가 지나치지 못하는 달달한 24시간 방앗간이 생긴 지 오래입니다. 술을 못해 벌게진 얼굴을 하고 걷는데 참새가 그럽니다. 이러쿵저러쿵 조잘 재잘. 그래서 나도 그랬습니다. 아빠도 그렇다고. 그러니 참새가 냅따 그럽니다. 그러니까 아빠는 어른이잖아요. 


아, 그랬네요. 나는 어른이었습니다. 하기 싫고, 귀찮고, 힘든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어른. 그래도 어른이 안 어른하고 차이가 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적당'하게 할 수 있는 조절 능력이지 싶습니다. 문맥의 뉘앙스에 따라 대충대충의 의미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적당도 당연히 포함되는 거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적당'은 '자기 기준'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를 의미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조절하기 어려운 게 '적당히'인 듯합니다. 다 각자의 적당이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적당의 기준이 들쭉날쭉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기야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지 싶습니다. 그때의 기분이 적당의 기준을 고무줄처럼 만드는 본능적인 삶에 더 유혹을 받는 거니까요. 어쩌면 그게 '인간적이야'라는 말로 자기변명과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환경이어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당'한 자기 기준을 찾고 실천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10대들은 알아서 그렇게 따라 배울 수 있지 싶습니다. 번아웃 되지 않게 일과 휴식을 적당히, 먹고 마시는 양을 적당히, 움직이는 양을 적당히, 말하기와 듣기를 적당히, 선택과 집중을 적당히, 낮과 밤을 적당히, 읽기와 쓰기를 적당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상에서 달달하게 '적당'한 것들을 찾아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어릴 적 - 어리다는 건 상대적인 거니까 나이에 관계없겠다 싶습니다만 -부터 그 연습이 조금이라도 된다면 어른이랍시고 '적당'한 자기 기준도 없고, 무작정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고립된 상태. 그 상태에 빠진 일그러진 어른들이 저지르는 묻지 마 범죄는 생겨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참으로 공포스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집 앞에는 24시간 떠 있는 두 개의 달이 있습니다. 달아 달아. 달달구리 방앗간에 들어만 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참새이지만, 혀끝에 와닿는 달콤함에 빠진 듯 하지만, 눈이 달아지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적당'하게 확실한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게 어른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그러니까 어른, 이라는 말이 한 달 전 밴쿠버 만난 몬테소리 유치원 재레미 원장님의 '셀프 바운더리(자기 한계)'로 들리는 이유입니다. 



-------(한줄 요약)

자기 한계를 알아가면서도 달달한 눈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어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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